2023/02 8

(詩)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 박노해 시인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 박노해 시인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슬퍼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삶에서 잘못 들어선 길이란 없으니 온 하늘이 새의 길이듯 삶이 온통 사람의 길이니 모든 새로운 길이란 잘못 들어선 발길에서 찾아졌으니 때로 잘못 들어선 어둠 속에서 끝내 자신의 빛나는 길 하나 캄캄한 어둠만큼 밝아오는 것이니

현대시/한국시 2023.02.26

(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시인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시인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뭇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집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을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깻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

현대시/한국시 2023.02.26

(詩) 편지-시골에 있는 숙에게- 신경림 시인

편지 -시골에 있는 숙에게- 신경림 시인 신새벽에 일어나 비린내 역한 장바닥을 걸었다 생선장수 아주머니한테 동태 두 마리 사 들고 목롯집에서 새벽 장꾼들과 어울려 뜨거운 해장국을 마셨다 거기서 나는 보았구나 장바닥에 밴 끈끈한 삶을, 살을 맞비비며 사는 그 넉넉함을, 세상을 밀고 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생각하느니보다 삶은 더 크고 넓은 것일까, 더 억세고 질긴 것일까 네가 보낸 편지를 주머니 속으로 만지면서 손에 든 두 마리 동태가 떨어져나갈 때까지 숙아, 나는 걷고 또 걸었구나 크고 밝은 새해의 아침해와 골목 어귀에서 마주칠 때까지 걷고 또 걸었구나

현대시/한국시 2023.02.26

(詩) 좋은 일 / 곽재구 시인

좋은 일 / 곽재구 시인 익은 꽃이 바람에 날리며 이리저리 세상 주유하는 모습 바라보는 것은 좋은 일 어린 물고기들이 꽃잎 하나 물고 상류로 상류로 거슬러올라가는 모습 바라보는 것도 좋은 일 유모차 안에 잠든 아기 담요 위에 그려진 하얀 구름과 딸기들 곁에 소월과 지용과 동주와 백석이 찾아와 서로 다른 자장가를 부르려 다두다 아기의 잠을 깨우는 것은 좋은 일 눈 뜬 아기가 흩날리는 꽃잎을 잡으려 손가락 열개를 펼치는 것은 좋은 일 아기의 손가락 사이에 하늘의 마을이 있어 꽃잎들이 집들의 푸른 창과 지붕에 수북수북 쌓이고 오래전 당신이 쫓다 놓친 신비한 무지개를 꿈인 듯 다시 쫓는 것은 좋은 일 [꽃으로 엮은 방패], 창비, 2021.

현대시/한국시 2023.02.12

(詩) 봄을 입고 - 이대흠 시인

링크: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1812 [문태준의 詩 이야기] - 불교신문 내 마음의 언덕에 집 한 채 지었습니다 그리움의 나뭇가지를 얽어 벽을 만들고 억새 같은 쓸쓸함으로 지붕을 덮었습니다 하늘을 오려 붙일 작은 창을 내고 헝클어진 바람을 모아 섬돌로 두었습 www.ibulgyo.com 봄을 입고 - 이대흠 시인 내 마음의 언덕에 집 한 채 지었습니다 그리움의 나뭇가지를 얽어 벽을 만들고 억새 같은 쓸쓸함으로 지붕을 덮었습니다 하늘을 오려 붙일 작은 창을 내고 헝클어진 바람을 모아 섬돌로 두었습니다 그대 언제든 오시라고 봄을 입고 꽃을 지폈습니다

현대시/한국시 2023.02.12

(詩) 길 – 박영근 시인

길 – 박영근 시인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현대시/한국시 2023.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