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텃밭 - 김종해 시인

밝은하늘孤舟獨釣 2023. 11. 5. 13:30

텃밭 - 김종해 시인

 

내가 뿌린 씨앗들이 한여름 텃밭에서 자란다

새로 입적한 나의 가족들이다

상추 고추 가지 호박 딸기 토마토 옥수수 등의

이름 앞에 김씨 성을 달아준다

김상추-김고추-김가지-김호박-김딸기---

호미를 쥔 가장의 마음은 뿌듯하다

내 몸 잎사귀 가장자리마다 땀방울이 맺힌다

흙 속에 몸을 비끄러매고 세상을 훔쳐보는 눈,

잡초의 이름 앞에도 김씨 성을 달아준다

잡초를 뽑아내는 내 손이 멈칫거린다

김잡초, 그러나 나는 단호하다

늘어나는 식구들 때문에 가장은 바쁘다

흙의 뜻을 하늘에 감아올리는 가장은 바쁘다

오늘은 아버지께 한나절 햇빛을 더 달라고 한다

목마른 내 가족들에게 한 소나기 퍼부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아아, 살아 있는 날의 기도여!

 

문학세계사, 2002년, 김종해 시집 <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