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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 나태주 (1945- )현대시/한국시 2010. 2. 10. 11:40
눈길 / 나태주 (1945-)
지난밤 폭설이 내리고 출근길 막혀 직행버스 다니는 큰 길에서 하차, 시내버스길 8키로 작정없이 걷기로 하다. 얼만큼 걸었을까? 뒤에서 경적과 함께 차 한 대 멈춰서 태워준다 하기에 운전하는 사람 얼굴 보았더니, 그는 우리 학교 가까운 송촌마을 학부형. 자기네 동네에도 중학생들 등교하는 시내버스가 오지 않아 아들을 중학교까지 실어다주고 돌아가는 길이라 한다. 눈길을 조심조심 운전해 가던 그가 말을 꺼낸다. 자기네 딸은 4학년, 공부는 썩 잘 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씨가 착하고 일기를 열심히 쓰는데 가끔 훔쳐서 읽어 보면 거기에 교감인 내 얘기도 들어 있다는 것. 나는 우리 학교에서 교감선생님이 제일로 좋다, 내가 커서 어른이 되면 티부이는 사랑을 싣고에 나가 교감선생님을 찾겠다는 말도 쓰여 있다는 것. 온 녀석두, 몇 차례 음악시간 보충수업 들어가 노래 시켜 보고 잘한다 칭찬해준 일 잇고, 3학년 때부터 머리를 뽀골뽀골 파마로 볶아 다람쥐꼬리처럼 뒤로 묶고 다니길래 만날 적마다 어여쁘다 머리 쓰다듬어 준 일밖에 없는데, 얼굴이 사과덩이처럼 둥글고 붉으스름한 4학년짜리 수진이라는 계집아이. 왜 하필 저의 담임도 아니고 교감인 나였을까? 그 애가 자라서 티부이는 사랑을 싣고에 나가려면 앞으로 20년은 더 기다려야 할 텐데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기나 할까요?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코허리가 찌잉해 온다. 30년 넘게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한 초등학교 교단, 모처럼 큰 상을 혼자만 받은 듯. 어제 저녁 폭설이 내리고 시내버스가 오가지 못하도록 길이 막힌 건 얼마나 잘된 일인가! 마음속에 모처럼 하얀 눈이 곱게 쌓여 아무도 가지 않은 순결한 길이 하나 멀리 멀리까지 열려 손짓해 나를 부르다.
<시인 소개>
1945년 충남 서천 출생. 공주사범학교 졸업. 1971년 《서울신문》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시집《대숲 아래서》《누님의 가을》《막동리 소묘》《추억의 묶음》《풀잎 속 작은 길》등. 흙의문학상, 충남도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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