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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 아고라/부동산 토론방/sunshine님의 글: 미국의 금리 인상이 가져올 파장과 과거 정책
    사람되기/시사 2015. 3. 13. 12:55

    출처: 


    미국의 금리 인상이 가져올 파장과 과거 정책 


    sunshine님의 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해가 지지않는 나라 영국의 패권은 미국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바로 미-소 냉전이 시작되고 미국은 미 기득권에 저항하는 제3세계 지도자들에게 공산주의 또는 친공산정권이라는 붉은색을 칠하고 제거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미국의 석유회사들이 세계시장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국제 관행상 세계의 석유는 달러로 가격이 형성됐습니다. 따라서 석유가격이 급등하면 그 석유를 사기 위해 미국의 달러화 수요도 급격히 증가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월남전 수렁에 빠져 급격히 증가하는 막대한 부채로 어려움에 닥치자 미국의 기득권 세력은 1971년 달러-금 본위제를 폐지하고 그 대신 석유-달러 본위제로 바꾸어 놓았고, 석유 결제는 반드시 달러화만 통용되게 만들었습니다.

     

    하락하는 달러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1973년 세계적으로 석유 공급을 제한하고 석유가격을 인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후 키신저의 농간으로 중동전쟁이 일어나 중동국가들의 석유 금수 조처를 유도했습니다. 석유가격이 하루 아침에 400%(11,65달러) 인상되자 그동안 타산이 맞지 않아 파산 직전이었던 영국의 북해와 알래스카 유전에서 이익을 남겨 개발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유가 폭등으로 돈 벼락을 맞은 산유국들의 달러는 다시 재순환되어 채권 형식으로 미국의 주요 은행으로 되돌아와 미국의 재정적자에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유가의 폭등은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 경제를 후퇴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는 1973년 키신저의 오일쇼크는 세계 경제에 커다란 충격을 준 반면 뉴욕과 런던의 주요 은행들과 다국적 석유회사들에게는 막대한 이득을 안겨주었습니다.

     

    오직 이란의 석유 때문에, 1953년 미국의 지원으로 왕이 된 팔레비는 유가 급등으로 국고에 달러가 넘치자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독일과 프랑스와 합작으로 핵발전소를 건설하려 하자, 영-미는 이란의 석유 구매를 보장하지 않음으로써 협상을 1978년 결렬되고, 영국의 구매량이 60%로 줄어들자 이란은 재정 압박을 받아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이란 혁명이 발발해 1979년 1월 팔레비는 해외로 도피했고 호메이니가 정권을 잡았습니다. 이란 사태로 석유공급이 급감하자 다시 유가는 1978년 배럴당 14달러에서 40달러로 폭등했습니다.

     

    석유가격이 폭등하자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은 소득이 정체되고 물가는 폭등하는 지독한 스태그플레이션을 경험하게 됩니다.

     

    1980년대 초 물가 폭등으로 미국의 금리는 20%라는 엄청난 수준을 기록했습니다. 이 금리로는 어떠한 사업이나 투자도 결코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건설에 대해서만큼은 이러한 이자율이 금지되어 부동산 거품을 방치했습니다.

     

    달러로 표시된 석유 수입 평균 가격이 1979년 초 이란사태 이후 140%나 상승하면서 개발도상국들은 자신들의 통화로 환산한 달러화 역시 미국의 정책으로 야기된 미국의 높은 금리 때문에 치솟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1970년대 오일쇼크 기간 중 미-영 은행으로 들어오는 OECD의 새로운 석유 자금의 갑작스런 공급과잉으로 최대 규모의 대출 잔치가 벌어지면서 개도국들의 외채는 1차 오일쇼크가 발발하기 전인 1973년 1300억 달러였던 것이 1982년에는 6100억 달러로 5배 증가했습니다.

     

    미국의 은행은 개도국들에 막대한 규모의 넘치는 석유달러를 변동금리로 순환시켰습니다. 1979년 이전에는 이러한 변동금리가 개발도상국들의 석유 적자를 메우는데 그다지 해롭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1979년 10월에 미국의 금리가 1978년 평균 7%에서 1980년 20%로 상승하면서 개도국의 외채 이자 부담은 몇 배로 늘어났습니다. 그 결과 심각한 경기 침체에 빠지면서 개도국들의 경제는 붕괴되었습니다.

     

    경기가 심각하게 둔화되자 미국은 금리를 1982년 12월 무려 40%가 하락한 수준으로 떨어뜨렸습니다. 저금리가 되면서 부채가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오늘 돈을 빌리고 내일 더 낮은 금리로 상환하는 것이 더 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부터 미국은 5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1914년 이래 처음으로 세계 최대의 채권국에서 순채무국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부채는 쌌으므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가계들은 주택, 자동차, 전자제품 등을 구입하느라 기록적인 수준의 빚을 졌습니다.

     

    레이건의 회복 정책 아래서 예산 적자는 미국 경제의 진짜 기초 건강 상태를 드러내고 있었고 미국 경제는 부채로 심하게 병들어 있었습니다.

     

    1985년 미국의 뜻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는 역전된 오일쇼크를 추진하도록 설득당해 석유가격은 불과 몇 달 전만해도 배럴당 26달러였던 것이 1986년 봄에는 배럴당 10달러 이하로 뚝 떨어졌습니다.

     

    1986년의 유가 붕괴는 대공황 직전의 투기 거품에 비견될만한 사태를 야기했습니다. 뉴욕 증권시장에서는 한몫 보려고 투기 자금이 유입되면서 거품이 일어났습니다.

     

    레이건과 뒤를 이은 부시(아버지)의 속칭 부자감세인 조세정책으로 미국 역사상 전례 없이 극소수의 기득권층에게 부를 집중시켰습니다.

     

    1986년의 석유가격 폭락은 뜻하지 않게(?) 구소련의 마지막 치명타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러시아와 비슷하게 구소련도 경제수입의 50% 이상이 석유 판매로 벌어들였는데 유가 하락으로 소련의 수입은 급감했고 생활고에 국민들의 소요는 소련의 붕괴에 불을 당기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뒤이어 소련은 해체되었습니다.

     

    1985년 반강제적인 플라자 합의를 통해 일본의 통화가치를 2배로 올림으로써 일본에 진 부채를 반으로 줄이는 효과를 보았고, 엔고로 수출기업들이 도산위기에 빠지자 일본은 금리를 지속적으로 내려 수출기업들을 도우려고 했으나 그 부작용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주식과 부동산의 거품으로 나타났고 일본에 입장에서 보면 미국의 부동산과 주식이 싼 것처럼 보이게되어 엔을 앞세워 미국의 기업과 부동산을 사들였습니다.

     

    전통적인 중동의 패자인 껄끄러운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1980년 이라크의 후세인을 부추겨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앵글로-아메리카의 목적은 이란을 간접적으로 공격하고 전쟁이 계속 이어지게 만들어 이란-이라크 양측이 넘쳐나는 석유 대금으로 서구의 무기를 대량으로 구입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란-이라크의 8년 전쟁이 90년대에 끝나자 막대한 외채 부담을 안고 있는 후세인정권은 부채를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사주를 받은 쿠웨이트왕가는 1986~87년의 유가 폭락 이후 합의되었던 OECD의 생산 상한제를 어기고 자국의 석유를 넘치게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 쿠웨이트는 배럴당 19달러에서 13달러로 그리고 7월 배럴당 10달러로 역석유파동을 일으켰습니다. 이라크는 채무를 갚기는커녕 다급한 식량과 의료품조차 수입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미 정부가 과거 이라크의 땅이었던 쿠웨이트 사이 분쟁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를 잘못 인식한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침공했고, 바로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하고 쿠에이트에 미군기지를 세워 영구적인 주둔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걸프전의 비용을 지출하는데 총 545억 달러를 보증하겠다는 언약을 한 동맹국인 독일,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으로부터 받아내어 미국은 걸프전을 다 치르고도 약 190억 달러의 순익을 냈습니다. 이러한 행태는 전 세계의 석유를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사막의 폭풍작전과 1990년 후반 이라크에서 공급받기로 한 석유 협정의 와해로 국제유가가 초기에 배럴당 30달러 이상 급등한 여파로 개도국의 경제는 다시 황폐해졌습니다.

     

    1980년대 말 독일의 통일과 소련의 해체로 냉전이 종식되어 악의 제국이 사라지자 미국은 새로운 적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악의 축으로 이란, 이라크, 북한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지정학의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석유와 달러였습니다.

     

    1990년대 초 구소련이 붕괴되자 과거 자유 진영의 자본주의 동맹국들은 이제 잠재적인 경제적 라이벌이 되었습니다. 일본과 동아시아 국가들 그리로 유럽 연합의 가파른 성장이 미국의 지배권에 대한 주요 도전자로 등장했습니다.

     

    클린턴 행정부와 그의 월스트리트 동지들은 1990년대에 자유시장이 부와 번영을 이루는 길이라는 약속으로 한 지역씩 차례로 자신들의 직접적인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였고 모조리 자본시장을 개방시켰습니다.

     

    그들이 내건 덫의 구호는 '지구화(globalization)'였는데, 실제로 그것은 미국의 금융과 기업의 힘을 통해 강화되는 미국의 힘의 지구화였습니다.

     

    1980년대 말 일본은 세계에서 최고의 경제 및 금융 강국이 되었습니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시절의 재정 적자와 세출 초과를 충성스럽고도 정력적으로 지원한 나라는 일본뿐이었습니다. 독일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지원한 대가는 1990년대가 시작되면서 세계 역사상 가장 끔찍한 금융붕괴로 다가왔습니다.

     

    일본의 저금리는 치솟는 도쿄 증권시장에서 빠른 이익을 낼 수 있는 길을 찾아냈고 곧이어 부동산에 대한 거대한 거품이 부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990년 3월, 거품이 터지자 니케이 증권시장은 정점에 비해 무려 1조 달러(23%) 넘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몇 개월 뒤 일본 주식은 장부가로 거의 5조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습니다.

     

    1993년에 개막된 APEC 정상회담에서 워싱턴 관리들은 '동일한 경쟁 조건'이라는 논리로 동아시아 경제권들에 통제되고 있는 금융시장을 개방하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일단 동아시아의 신흥경제국들이 외국자본에 문을 열었지만, 후폭풍에 대해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했고 경험도 없었습니다. 충분히 적절한 통제력을 갖추기도 전에 250년 자본주의 경력을 가진 월스트리트의 세력들은 헤지펀드로 동아시아의 신흥국들인 호랑이 국가들에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동아시아는 IMF에 의해 달러화의 지배를 받는 또 다른 변방으로 종속시켰습니다. 당시 루빈 재무차관은 그것을 미국의 강한 달러 정책이라고 불렀습니다.

     

    미국의 20세기는 무엇보다도 석유의 전 세계적 흐름에 대한 통제 위에 구축되었습니다. 키신저는 1973년 1차 오일쇼크 당시 '석유를 통제하면 세계의 모든 나라들을 주무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1971년 금본위제 철폐 이후 미국은 한때 성공적이었던 자국의 산업경제를 서서히 공동화해버렸습니다. 미국은 유럽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독일의 부흥을 용인했고, 태평양 지역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힘에 대한 아시아쪽 대항세력을 키우기 위해 일본과 한국 그리고 대만의 성장을 허용했습니다.

     

    그것은 무슨 우호정신의 발로가 아니었고 고전적인 세력균형 지정학의 미국판일 뿐이었습니다. 독일, 일본, 이스라엘을 사실상 총독으로서 장악하고 미국의 대리인 역할을 맡겨 미국의 20, 21세기를 기획한 것입니다.

     

    석유를 장악하면 석유 수입에 의존하는 다른 나라들이 석유 수입을 위해 달러화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한 달러화의 수요는 미국의 무역 위상이 약화되는 것을 막아주고 미 정부의 부채로 귀결되는 무역이 새로운 형태의 미국의 힘, 곧 세계 금융시장에 대한 힘의 기반을 형성했습니다.

     

    1997년과 98년의 동아시아의 경제충격은 서방 언론들이 즐겨 언급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위기는 소련의 해체로 인한 냉전종식으로 중요한 신생 경제지역 출현이 불가피함에 따라 급격히 성장하는 경제적 경쟁자들에게 재를 한 번 뿌림으로써 현 사태를 역전시키고자 하는 몰락해가는 초강대국 미국의 절망적인 몸부림이었습니다.

     

    앵글로아메리카의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부채가 증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부채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올 때마다 부채를 줄여야 제국을 유지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미국은 부채를 제3국으로 이전시키고 인플레이션도 제3국으로 이전시켜왔습니다.

     

    미국은 상황에 따라 경기가 좋지 않을 때 약한 달러 정책으로 금리가 내려가면 일본과 유럽, 그리고 신흥국들은 싼 달러로 국가의 인프라를 깔고 사회 간접자본에 투자해 가파르게 미국을 따라잡았습니다.

     

    하지만 강한 달러 정책으로 금리가 올라 달러가 강해지면 신흥국들의 달러가 다시 미국으로 재순환되면서 많은 부를 미국으로 회귀시키는 전략을 반복해왔습니다.

     

    (20세기 세계사의 진실에서 많은 부분 참고 했습니다)

     

    이번 2015년에 미국은 공식적으로 금리를 올린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3년 동안 지속적으로 금리를 올릴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미국의 금리가 오를 때 어떤 국가들의 부는 미국 기득권에게 강탈당할 것입니다.

     

    다만 우리나라는 아니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동안 정책 당국자들이 잘 대비했다고 믿고 싶습니다.

     

    소득은 정체되고 비정규직과 영세 자영업자들은 몰락하기 직전인데 지금 부동산 시장은 때아닌 저금리의 대출과 전세금의 폭등으로 어쩔 수 없이 아파트 거품이 유지되고 있는 듯 보입니다만 과연 초강대국 미국의 금리 인상은 어떤 영향을 우리에게 줄 지 조금은 두려워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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