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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태비전과 토착화 (황종렬 박사)아름다운 인생/종교 2015. 10. 18. 18:51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태 비전과 사회적 토착화 (황종렬 박사)
차 례
1. 시작하면서
2. 하느님 살림의 육화로서 사회적 토착화의 규모
3. 하느님 살림의 구조 안에서 삼생태
1) 하느님의 살림 안에서 자연 생태
2) 하느님의 살림 안에서 인간 생태
3) 하느님의 살림 안에서 사회 생태
4. 맺으면서
1.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살림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열려 있으면 열려 있을수록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가깝고,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하느님의 살림과 복음에 참여하는 일관성이 커진다. 역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살림과 복음을 식별하는 규모가 작고 그분의 살림과 복음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일관성이 작을수록, 그만큼 하느님의 살림과 복음,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존재에서 멀게 된다. 이것은 하느님의 살림을 부분화하면 할수록 그만큼 신학과 영성과 사목의 규모가 작아지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늘 21세기 우리 교회의 신학과 영성과 사목을 하느님의 살림에 부합한 형태로 할 수 있는 한 충실하게 integral하게, 온전하게 통합해서 제시하고 살아가게 하려는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이 간직한 이런 관심을 우리 교회와 현대 사회와 공유하기 위해서 헌신하고 있다. 이러한 투신은 특히 그가 현대 세계에서 우리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것과 관련하여 2013년 11월 24일에 발표한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과 2015년 5월 24일에 발표한 생태 회칙 <Laudato Si’: 찬미받으소서>에 뚜렷이 드러나 있다. 교황이 복음의 기쁨에서 우리 교회의 복음화와 관련하여 핵심 용어로 사용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inculturation”이다. 뒤의 문헌에서 교황은 “통합 생태(integral ecology)”라는 개념으로 하느님 살림을 구성하는 “삼생태,” 곧 “자연 생태”와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를 아우르면서, 하느님의 살림을 육화시키는 투신으로서 그리스도인의 투신 비전을 제시하였다. 아래에서는 하느님의 살림을 통으로 오늘 우리의 존재장에 육화시키고 싶어하는 교황의 관심에 초점을 맞추어서 위의 두 문헌을 중심으로 그의 생태 살이와 토착화 비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복음의 기쁨>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자는 inculturation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토착화”로 번역하였다. 그러면 inculturation-토착화가 무엇인가? 이 문헌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의 자리, 자신의 존재장(存在場, being-fields)에서 하느님의 살림의 복음을 어떻게 육화시킬 것인가, 곧 자기 사회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를 토착화시킬 것인가를 묻고 답한 현대 교회의 복음화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두 문헌으로 대변되는 교황의 토착화 비전을 이런 관점에서 진술하자면, 하느님의 통생태를 구성하는 자연, 인간, 사회 생태와 함께 이 세 생태를 통하여 하느님의 살림을 육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교황이 말하는 통합 생태의 inculturation-토착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여기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는 복음의 기쁨과 찬미받으소서를 이해하고 살아가는 데 관건을 이룬다 할 것이다.
복음의 기쁨에서 교황이 증거하는 것처럼, inculturation은 하느님의 나라를,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당신의 창조계에(cultura로 표현된) 육화(incarnatio)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기법적인 것이기 이전에 존재 전달이고 존재 공유이다. 또한 이러한 존재 공명을 통하여 하느님의 살림 안에서 복음을 매개로 만나는 인간을 포함하는 우주적 너-너희를 너-너희로 자발(自發)하게 하는 과정이고, 이것은 하느님의 집안과 살림을 구성하는 존재와 활동으로서 삼생태를 복음적으로 육화시키는 여정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inculturation-토착화는 우리가 먼저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먼저 하신다. 그분의 존재 전달로서 창조와 그분의 존재 전달로서 구원이 당신의 존재장-우주-지구-우리 가운데 육화되는 과정이고, 이것이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토착화로 드러난다. 이어서 하느님의 살림으로서 토착화의 결과인 우리 인간이 그분의 살림으로서 토착화에 참여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토착화, 우리의 inculturation, 삼생태에 대한 복음적 응답을 통한 우리의 존재 전달로 나타난다.
우리의 토착화는 하느님의 토착화와 다를 수 있다. 하느님의 토착화는 언제나 선이고 그분의 숨은 언제나 살린다. 악인들이 그분의 토착화와 숨을 악이라거나 파괴라고 말하는 것은 그분의 토착화와 숨 앞에서 그들의 악이 흔들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토착화는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 부분적으로 선하면서 악할 수도 있고, 악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선한 결과가 잉태될 수도 있다. 우리의 토착화를 선으로만 여겨서는 토착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토착화는 그 자체가 선한 것이 아니라, 선을 지향하는 것이고, 그럴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토착화에서 어떤 토착화인가, 어떤 inculturation인가, 어떤 존재 전달인가를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늘 우리의 공동의 집 지구에서, 우리의 삶의 자리로서 사회(societas)에서 복음을 육화시키는 믿음의 투신으로서 하느님의 살림의 inculturation-토착화에 대해서 질문하고, 이에 대한 우리 교회의 응답 방향을 제시해 갈 것이다.
2.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태 비전에서 하느님 살림의 육화
프란치스코 교황은 토착화를 복음화와 이어 보면서, 이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 가운데 육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토착화는 하느님의 창조와 함께 시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하여 온전한 형태가 계시되며 마지막 때에 하느님의 창조가 완성되는 때에 온전한 형태에 이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토착화는 하느님의 살림을 위한 존재 전달로 시작되고 진행되고 완성되며,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느님의 존재 전달로 하느님의 살림의 육화가, 곧 신학적 토착화가 실현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존재 전달로서 그분의 나라의 실현에 참여한다. 교황은 이런 근본 사명에 비추어서 우리 교회가 안고 있는 한계들을 알고 있다. 그는 이러한 한계들을 극복하는 데 요청되는 복음적 대안과 비전을 갖고 있고, 우리 교회는 물론 세계 공동체와 이것들을 공유해 가고 있다. 아래에서 나는 하느님의 존재장에서 그분이 이루어 가시는 살림의 육화와 그 육화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응답과 참여로서 사회적 토착화에 관하여 살펴볼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비판에는 대안이 있다. 단적으로, 그에 의하면, 복음의 기쁨 2장과 차니받으소서 1장에서 집중적으로 진술하는 문제 현상들이 사회와 교회에서 계속 나타나는 것은 하느님의 살림의 토착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부분적으로 복음이 토착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파괴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가 말하는 “토착화”는 inculturation으로 표현되는데, 그에게서는 “토착화”와 “복음화”는 물론 그리스도 가치의 “문화화” 역시 육화의 관점에서 교환 가능한 언어로 나타난다. 그는 “초보적인 형태라도 토착화를 적극적으로 촉진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진술한다. “우리가 추구하여야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각 문화의 고유한 분야들에 따라 표현된 복음 선포가 그 특정 문화와 새로운 종합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복음이 한 문화에 뿌리내리고 있다면 메시지는 더 이상 개인에게서 개인으로만 전달되지 않습니다.” “일단 복음이 한 민족 안에 토착화되면, 문화 전수의 과정에서 신앙도 늘 새로운 방식으로 전달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화를 토착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복음의 토착화를 위해서는 문화의 복음화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하느님의 살림을 내용으로 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한 문화에 육화되면(in-cultura-tion=incarnation+culture=>being born in the culture), 복음을 자신이 사는 문화에 육화시켜서 복음이 그 문화에서 뿌리를 내려 생동력을 갖게 된다. 이때 그 문화 안에서 사는 이들은 동시대인이나 후세대나 복음을 자신의 존재의 일부로 곧 문화적 유전자와 같은 형태로 살게 된다. 물론 이것이 복음을 자동적으로 체화해서 자신의 삶 안에서 실현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유전자가 현실 삶에서 그대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나타나는 조건들과 맞물려 작용하면서 적응된 형태로 발현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적어도 사회 안에서 하느님의 살림의 길로서 복음이 토착화되면, 그것이 삶의 기본 영향 관계 요소로 자리잡게 된다는 점에서, 적어도 개인마다 초기 학습을 다시 해야 하는 어려움을 그만큼 덜 겪을 수 있게 된다.
토착화와 관련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은 토착화의 주체가 성령이시라는 것과 무엇을 토착화할 것인가를 입체적으로 식별하고 있다. 이것은 사회적 토착화의 규모에 대한 통합적 인식으로 나타난다. 토착화란 어떤 인간이나 그룹이 이룬 것을 다른 지역에 혹은 자신이 사는 곳에 이식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이 먼저 선수쳐서(primerear) 당신의 존재, 당신의 살림을 전달해 주심으로써 이루어지고, 그분의 존재 전달과 살림에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교황에게서 교회가 토착화할 것은, 곧 자기 사회와 문화에서 육화시킬 것은 교회가 그동안 역사 안에서 역사적 형성물로 이루어온 다양한 것들에 앞서, 교황이 복음화로 이해하고 있는 그것을 여기에 적용하여 진술하자면, “하느님 나라” 자체다. 이런 관점에서 inculturation이라는 개념을 만든 선구자들의 조어법을 빌려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리는 복음의 사회적 토착화를 표현하자면, “사회 안에 하느님의 살림을 육화시키는 것”으로 말할 수 있고, 이를 영어로 표현하자면, in-societa-tion으로 쓸 수 있다.
위에서 무엇을 토착화할 것인가에 관해 진술하면서 드러난 것처럼, 복음화하고 토착화할 것들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교황이 복음의 기쁨에서 사용한 개념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이것들 사이에는 “위계”가 있다. 교황은 “선포는 본질적인 것에, 곧 가장 아름답고 가장 크고 가장 매력적이면서 가장 필요한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황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덕의 위계론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진리의 위계관을 빌어서, 선포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 복음이라고 말한다. 그는 복음을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절제에 대한 강론이나 가르침이 사랑과 정의에 대한 그것에 앞설 수 없고, 법이 은총에 앞설 수 없고, 교회가 그리스도보다 앞설 수 없고, 교황이 하느님 말씀보다 앞설 수 없고, 금욕이나 자기 부정에 관한 가르침이 복음에 앞설 수 없다. 교회의 외적 형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앞설 수 없고, 교회의 특정 전례 형태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용서에 앞설 수 없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에게서 복음화는 “하느님 나라를 우리 세상에 현존하게 하는 것”인데, 이런 맥락에서 토착화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곧 하느님의 집안 살림(oikonomia Dei, oikos Theou)이 우리 가운데 작용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는 대안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는 우리 교회가 이 복음을 사는 데 요청되는 것을 입체적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살아갈 가능성을 실제적으로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교황은 복음화와 토착화를 이룰 것을 하느님의 나라로 보면서, 이 나라를 분절적인 방식이 아니라 통으로 이해한다. 교황은 자신의 이러한 관점을 특히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매우 선명하게 드러내면서, 이를 “통합 생태” 개념에 담아 놓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 존재 전달을 통하여, 곧 그분의 오심과 사심과 먹히심과 달리심과 묻히심과 일으켜지심을 통하여 선포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존재 전달로서 그분의 온 창조계를 포용한다. 교황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태 비전을 설명하면서 그가 “한 신비가요 순례자”로서, “하느님과 다른 존재들과 자연과 자기 자신과 경이로운 조화 속에서 살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각각 고유하게 하느님의 통생태 안에서 자연 생태와 함께 다른 사람들과 사회 생태를 이루어 살면서 모두가 인간 생태 차원을 띠고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의 주체가 갖는 구조성을 첫째 인간 인격 차원과 둘째 인간 사회 내지 문화 차원과 셋째 인간과 사회 혹은 문화와 연관된 자연 차원을 통합해서 볼 수 있다. 우리 교회는 이 통합 구조 속에서 자연과 사회 속에서 하느님의 살림과 복음의 육화로서 토착화를 이루게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이 교황명으로 “프란치스코”를 선택한 배경과 관련하여, 친한 친구 중의 한 사람인 사웅파울루 대주교 클라우디오 후메스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된 그를 포옹하며 “가난한 이들을 잊지 마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면서 이렇게 진술하였다. “이것이 나를 쳤습니다. ... 가나한 사람들... 나는 즉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생각했습니다. ... 프란치스코는 평화의 사람, 가난의 사람, 창조계를 사랑하고 보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교황 이름을 프란치스코로 택하였다는 것인데, 그의 교황 이름에 이미 하느님의 생태 살림 안에서 작용하는 평화의 사람으로 대변되는 인간 생태, 가난의 사람으로 대변되는 사회 생태, 그리고 하느님의 창조계로서 자연 생태가 배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 과정에서 이 세 생태를 통합하고자 하는 노력은 프란치스코 교황만이 아니라 서구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생태”로 번역해서 사용하는 말은 ecology인데, 이것은 eco와 logy가 합쳐진 말이다. eco는 “집”을 가리키는 oikos라는 그리스어에서 온 말이고, logy는 “말,” 혹은 “이야기”를 가리키는 logos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ecology는 원래 “집에 관한 이야기”를 뜻한다. 이를테면 “생태”는 하느님의 집에 관한 이야기, 하느님의 집안 살림 이야기로 알아들을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서구인들은 ecology와 economy를 대립시켜서 이해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다. economy 역시 프란치스코 교황이 “경제”를 설명하면서 지적한 것처럼, “집”을 가리키는 oikos라는 그리스어와 규범을 뜻하는 nomos가 결합되어서 집안 살림의 정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고대 교부들은 economia Dei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하느님의 구원 경륜,” 곧 “하느님의 집안 살림”을 가리켰는데, 이 개념은 자연스럽게 오늘의 natural ecology, 곧 자연 생태와 social economy, 곧 사회 경제를 모두 포용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economia Dei라는 말은 이미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 한 존재 한 존재와 온 인류, 곧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 모두와 자연 생태를 모두 포용하면서, 이 세 생태를 당신이 창조하신 목적에로 이끌어 완성에 이르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생태(ecology of God)는 자연 생태와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를 포용하고 또 이 세 생태의 상호 작용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 생태는, 아래에서 좀더 면밀하게 보겠지만, 인간의 말로 대변되는 지성, 몸과 몸의 관계로 대변되는 감성,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흙을 만지고 딛으며 일구는 손발로 대변되는 땅성,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를 잇는 뇌의 성찰로 대변되는 때성, 그리고 숨으로 대변되는 영성의 복합적 상호 작용을 포괄한다. 또한 사회 생태는 인간의 말이 사회 관계에서 작용하는 영역인 언론과 몸과 몸의 관계가 사회 구조에서 작용하는 정치, 손발로 수행하는 일이 사회 관계에서 작용하는 경제를 내포한다. 또한 성찰을 통하여 사회 관계 안에서 형성하는 학문과 예술, 줄여서 학예와 숨의 선물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 역시 포용한다. 이것은 인간 생태를 결정하는 모든 요소가 서로 상관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 생태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와도 분리 불가능한 형태로 이어져 있으며, 사회 생태 전 영역도 서로 단절될 수 없이 상관되어 있으면서 인간 생태 모든 차원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뜻한다. 자연 생태는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의 모든 차원 모든 양상의 존재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인간과 사회는 실제로 자연 안에서 자연과 함께 자연을 통하여 자기의 존재를 실현해 가고, 자연 생태는 인간과 사회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식별해 간다. 이를테면, 자연생태와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는 인간이 창조되어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이미 그 각 생태가 서로 교직되어 서로 존재의 바닥이 되어 주면서 상호 작용해 가고 있는 것인데, 이 세 생태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더 면밀하게 검토할 것이다.
교황은 창조계에 대한 포용적 관점에서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할 사명을 읽는다. 그는 여기서 자신이 말하는 “피조물”이란 “인간 삶의 모든 측면에 관련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은 인간 각 존재의 모든 차원과 인류 모든 존재와 이들의 삶과 관련된 온 창조물과 연계되어 있고, 그러므로 우리의 복음 선포는 이 세 인간 사회 자연 생태 차원을 유기적으로 통합한 형태로 포용하여 실현해야 하는 무엇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찾는 “하느님 나라”는 “우리 공동의 집” “지구”에서 존재하는 “인간 전체와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신앙 공동체가 하느님의 원살림의 규모에 보다 더 충실한 형태로 자신의 신앙을 살아가는 길로서 세 생태, 곧 자연-인간-사회 생태의 통합을 베네딕도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통합 생태 비전에 따라서 복음화와 토착화의 한 원리로 얻게 된다.
3. 하느님 살림의 구조 안에서 삼생태
1) 하느님의 살림 안에서 자연 생태
하느님의 나라, 곧 하느님의 다스림은 좀더 쉽게 하느님의 살림, 하느님의 생태 살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앞에서 보았다. 이 살림에서 인간과 사회 차원을 존립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먼저 창조하신 우주 만물이다. 우리는 이것을 하느님의 창조계 혹은 하느님의 자연, 하느님의 자연 생태계로 알고 살아간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 즉위 미사에서 자신의 교황 직분을 “수호자” 교회를 동반하는 것으로 제시하는데, “수호자”가 되는 소명은 “단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는 창세기에서 이야기하고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보여 준 대로 모든 피조물, 창조된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호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창조물 하나하나와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을 존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인간이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마다 우리가 피조물과 우리의 형제자매를 돌보지 못할 때마다 파괴의 길이 열리고 마음이 완고해집니다. 슬프게도 역사의 모든 시기마다 죽음의 음모를 획책하고, 파괴를 일삼고, 인간의 모습을 왜곡시키는 “헤로데”가 존재해왔습니다. 경제, 정치, 사회 생활에서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모든 선의의 사람들에게 간곡히 요청하고자 합니다. 피조물의 “보호자”, 자연 안에 새겨진 하느님 계획의 보호자, 인간의 보호자와 자연의 보호자가 되도록 합시다. 이 세상이 나아가는 길에 파괴와 죽음의 징조가 따르지 않도록 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서 자연 생태는 가톨릭 신앙 전통을 따라서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우리의 공동의 집”이고, 예수님 자신이 충만한 조화와 소통을 이루며 사신 생명의 동반자다. 창조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써 놓으신 문법과 우리에게 가꾸고 돌보라고 맡겨 주신 집”이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흙으로 대변되는 창조계를 자신의 존재의 원천으로 부여받은 존재로서, 흙의 먼지로 창조되어 우주가 지구와 함께 내주는 공기와 물로 숨쉬고 생명을 받으며 흙에서 나는 것들을 먹고 산다. 뿐만 아니라 몸을 통하여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우리에게 존재의 바닥이 되어 주는 온 창조계와 분리 불가능한 형태로 결합되어 있다. “영의 생명은 몸이나 자연, 혹은 이 세계의 실재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과 친교 속에서 그것들 안에서 그것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교황은 신앙의 빛 안에서 우리가 “물질의 고유한 질서를 신뢰하고” 보다 더 깊은 “조화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창조자 하느님과 구원자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만큼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되는 신앙의 진리다.
교황은 “예수님은 몸과 물질과 이 세계의 것들을 멸시하는 철학과 거리가 먼” 분이었다고 말한다. 도리어 그분은 “자신의 위격 안에 물질적 세계의 일부를 받아 합체시켜 주는 가운데 그 안에 결정적 변혁의 씨앗을 심어 주셨”고, 그렇기 때문에 “물질적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창조물은 육화된 말씀 안에서 그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몸성(bodiliness)을 배척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삶과 그리스도의 실존에 대한 새로운 성사적인 의미를 깨닫는” 과정을 통하여, 이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영원의 신비를 열어 주는,” 이를테면, “문”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 속에서 건강하지 못한 이원론이 일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에게 상흔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일그러지게 만들”기도 하였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신앙 전통을 모체로 형성된 서구 문명권에서 자연 생태에 대해서는 물론 비인격화하여 대상화시킨 다른 존재들, 다른 성, 다른 인종, 다른 종교인들에 대해서 폭력적인 인간중심주의와 배타주의와 식민주의의 한 원천을 형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한 생태 이해를 위해서는 건강한 인간 이해가 필요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런 관점에서 교황은 우리의 몸에 대한 태도와 창조계에 대한 태도가 맞물려 있다는 것을 주목하면서, “우리의 몸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 전체를 우리를 창조하신 아버지에게서 온 선물이자 우리의 공동의 집으로 기쁘게 맞고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우리의 몸을 받아들이고 그 몸을 돌보며 몸의 충만한 의미를 존중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진정한 인간 생태의 본질적 요소”로서, 이때 비로소 “우리의 몸에 대해서 절대적인 권한을 구가한다는 사고”로 “우리가 창조계에 대해서 절대적인 권한을 구가한다는 사고”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과 자연 생태의 상호 연관성에 대한 이같은 이해 위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온 창조계에서 존재의 원천을 제공받는 “수혜자일 뿐만 아니라 그 관리인”이기도 하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 생태에 대해 목자와 양의 관계에 들어서 있는 것에 비길 수 있는데, 예수님이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목자는 삯꾼과 달리 양들의 이름을 알고 그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거는 존재이기도 하다. 교황은 이런 맥락에서 자연 생태가 “경제적 이윤이나 무분별한 착취에 휘둘리는” 가운데 신음하는 현실에 대해 이렇게 진술한다. “우리는 토양의 사막화를 마치 우리 몸이 병든 것처럼 느끼고 동식물의 멸종을 우리 몸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느낍니다.” 그러므로 자연 생태를 단순히 도구화하여 “효용과 이익에만 바탕을 둔 개발”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은혜를 입고 있는 창조물을 선물로 여기는 개발 모형들을 찾”아야 한다.
지구로 대변되는 온 자연 생태, 하느님의 온 창조계를 돌보고 수호하는 것은 하느님의 집이자 우리의 집인 이것을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으로 지켜 가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서 다시 두 가지 핵심적인 신학적 비전이 도출되는데, 하나는 “세대간 연대”이고 다른 하나는 온 창조물과 이루는 찬양의 연대이다. 교황은 참 신앙은 “우리의 공동의 집”으로서 지구를 우리가 물려받은 상태보다 더 나은 상태로 후손들에게 물려주기를 바라는 열망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에는 단순히 이 시대를 사는 존재들만이 아니라 앞으로 올 세대까지 포함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공동의 집”으로서 지구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은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의 삶에 영향을 끼칠 파괴와 죽음의 자국들을 남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교황은 이런 맥락에서 “세대간 연대는 선택 대상이 아니라 정의의 기본 문제”라고 말한다. 이 자연이 파괴될 때, 여기서 제종류대로 살아온 곤충과 새들과 식물들과 동물들과 강과 바다와 산과 들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 “보시니 참 좋았다” 하실 때처럼 그렇게 깊은 만물의 찬양이 가로막히게 된다. 그러면 그럴수록 인간의 찬양은 외로워질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필리핀 주교들의 진술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밤새 비가 내린 뒤 흐르는 흑갈색의 강물을 보십시오. 그리고 이 강물이 이 땅의 생명의 피를 바다로 흘려보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 시궁창 같은 파시그 강에서, 우리가 오염시킨 그토록 수많은 강물 속에서, 물고기들이 어떻게 헤엄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 놀라운 바다 세계를 생명과 빛깔을 잃어버린 수중 묘지로 바꾸어 놓았습니까?”
교황은 생태 회칙을 통해서 인간이 자신에게 존재의 바닥이 되어 주는 자연 생태에 대한 무지와 폭력과 그 실상을, 그리고 자연 생태에 대한 무지와 무심에 기인하는 인간중심주의와 그 영향을 1장과 3장에서 구조적이고 입체적으로 조명하면서, 생태적 회심을 촉구한다.
하지만 교황은 자연 생태와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가 복합적으로 얽힌 구조 속에서 위기를 가중시키는 우리 자신에 의해 신음하는 이 세계에 직면해서 이 세계를 문제로 보는 데서 멈추지 말도록 초대한다. 그러한 상처를 입고 있는 세계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근원적으로 하느님에게서 온 것으로서, 하느님이 당신이 있게 하시고 돌보시며 온 창조물과 맺어 주시는 “자부적 관계(慈父的paternal relationship)”에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이 온 창조물을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는 것같이 돌보신다는 것을 깨닫게 한 전거를 새들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대목에서 보고 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온 창조물을 하느님의 한 집안의 가족으로 불러들여서 함께 찬양하도록 초대할 때 작용하는 만물 동근(同根) 의식의 원천을 이루는 것이기도 한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온 창조물과 인간 사이의 “우주적 형제애”를 보고 있다. 그러므로 교황에게서 온 세계는 근원적으로 기쁨과 찬양으로 관상해야 할, 기쁨으로 충만한 한 신비다. 인간과 사회에서 가해지는 그 모든 폭력과 그로 인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를 문제가 아니라 신비로 보고, 한 아버지에게 돌봄을 받고 한 아버지를 찬양하는 실체로 볼 수 있는 여기에야말로 가톨릭적 생태 인식과 살이의 역동성이 자리잡고 있다.
자연 생태에 대한 이같은 존재론적 식별과 포용과 동반 위에서 교황은 현대 사회구조에서 자연 생태가 상처받기 쉬운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직시하게 한다. 그는 현대 교회와 사회가 자연 생태가 “경제적 이윤이나 무분별한 착취에 휘둘리는” “힘없고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존재들”이 직면한 상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본다. 그런 가운데 이렇게 생존의 위협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존재들에 비존재화될 수 있는 태아와 가난한 사람들은 물론 “피조물 전체” 역시 포용해 들일 것을 요청하면서 창조물에 대한 죄와 인간과 하느님에 거스른 죄를 연결짓는다. 그는 오늘 우리 세대가 직면한 자연 생태의 위기와 사회에서 배제당하는 이들의 고통을 식별하여 여기에 응답하지 않고는 보다 더 나은 미래를 형성해 갈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교황은 가난한 사람들과 자연 생태 파괴를 다룰 수 있는 “새롭고 통합적이며 다학문적인 접근” 역량을 갖춘 정치가 요청된다고 강조하는데, 이것은 자연 생태와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가 본래 상호 연결되어 있는 데서 나타나는 필연적 결과다. 우리는 여기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통합 생태 비전에 따라, 인간과 사회와 통합된 형태로 “자연 생태”를 복음적으로 동반하는 것을 오늘 우리 교회의 사회적 토착화의 한 원리로 읽어 낼 수 있다. 이것은 지구에 존재하는 우주적 존재로서 모든 인간이 자신의 존재장에서 갖는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관계의 규모를 원래 형태로 통합해서 갈아갈 길을 보다 더 복음적이고 역동적으로 열어 줄 것이다.
지금까지 하느님의 살림 가운데 자연 생태가 신앙 실천과 갖는 상관성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시한 비전을 살펴보았다. 하느님의 살림이 자연 생태를 존재의 바닥으로 하여 인간과 사회 생태의 상호 관계를 통해 전개되어 간다는 것을 보았는데, 그러면 인간 생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았는지 아래에서 보기로 한다.
2) 하느님의 살림 안에서 인간 생태
교황은 인간이 “외양, 능력, 언어, 사고 방식”에 근거해서 평가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셨”고, “그들이 하느님께서 손수 빚으신 작품,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교황은 이것을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 안에서 배태되었다”고 표현하는데, 그러므로 인간은 “단순히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로서, “하느님 영광의 일부를 반영하는” 존재다. 교황은 인간이 다른 열린 시스템들의 진화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이유를 “당신”의 일부로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데서 보면서, 어떤 경우에도 대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주체로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창세기 2-3장의 저자는 이것을 하느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주셔서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인간이 우주와 지구의 한 실체이자 현상의 매개를 통해서 존재한다는 것과 자기 밖에서 주어지는 선물로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앞에서 생태의 규모와 자연과 인간 생태의 관계에 대해 진술하면서 언급한 적이 있고, 후자와 연관해서는 아래에서 좀더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그분의 숨으로 사는 존재 차원을 인간의 숨성 혹은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말로 영성(靈性, spirituality)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하는 데서 그치기로 한다. 하느님이 맺어주시는 이 직접적 관계성 때문에 “모든 인간은 주님의 한없는 사랑의 대상”으로 존재하고, “주님께서 몸소 그들의 삶 안에 머무”신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이렇게 직접 당신 모습으로 창조하여 존재하게 하신 그 “모든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소중한 피를 흘리셨”고, 그렇기 때문에 “외양이 어떠하든, 모든 사람은 지극히 거룩하”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존엄하고, “우리 사랑과 헌신을 받아 마땅하다.” 인간에 대한 이같은 이해 위에서 교황은 선언한다. “따라서 단 한 사람이라도 그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도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제 삶의 봉헌은 의롭게 됩니다.”
복음화는 이 인간 전체, 곧 인간 인격 전체와 관련되고, 모든 인간의 존엄은 모든 인간 활동에서 기준이 되어야 한다. 참으로 모든 인간은 하느님께 숨을 받아서 비로소 인간으로 존재하면서, 땅에서 온 것과 연관된 땅성과 감성과 지성, 그리고 시간과 역사와 연관된 인간 존재 차원을 말하는 때성과 영성을 갖추고 제 꼴로 살아간다. 이 과정에서 하느님의 노동에 참여하여 땅에서 나는 것들을 선물받아 살아가면서 하느님이 이루어 주신 짝-파트너 관계에 들어서며 지성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한다. 또한 하느님의 뜻을 성찰하여 세대의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형태로 공유하고 하느님이 주시는 것에 대한 믿음으로 그분의 살림에 참여하며 자신의 영성을 실현해 가게 된다.
땅성과 감성과 지성과 때성의 결과물들은 모두 각 존재마다 차이가 나고 그러한 차이는 차등을 발생시키며 이러한 차이와 차등은 차별을 유발시키게 된다. 모든 존재는 자신의 땅성에서 비롯되는 신체적 차이를 띠고, 관계를 형성하는 역량 면에서 차이를 드러내며, 지적으로도, 학문과 예술적 재능 면에서도 차이를 드러내고, 이에 따라서 다른 평가를 받으며, 그러한 평가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인간 사회의 일반적 현상이다. 측정 가능한 인간 세계에 머물 때, 이 “차이-차등-차별”의 3차를 넘어설 가능성은 인간의 지배욕에 질식당하고 만다.
그러나 이 모든 사회적 문화적 차이와 차등과 차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차별받을 수 없는 존엄한 존재이다. 인류 역사에서 이 인간학적 진리를 공유하기까지 수많은 희생과 헌신이 나타났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에게서 하느님의 숨을 받아 존재하는 존엄한 존재라는,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의하면,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하느님께 영혼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자각이었다. 인류 사회는 이것을 사회학적으로 인간의 “천부 인권”으로 표현해 왔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선포한다는 이유로 탄압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의 섭리로 풀려나서 다시 그분의 이름으로 가르쳤다. 성전 경비대장과 경비병들이 이들을 최고 의회로 데려가서 원로들 앞에 세웠을 때, 대사제가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 하며 다그쳤다.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이 응답한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 29). 이들은 율법교사로서 바리사이였던 가말리엘의 중재로 매질을 당한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최고 의회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사도 5, 40-42).
사도들은 종교적, 사회적 권력의 차이와 차등과 차별에 직면하여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하느님에게서 온 존재로서 그분에게서 온 존재의 이유를 실현하는 것을 어떤 것으로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을 자신들의 존재를 통해서 증거하였다.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진흙으로 대변되는 이 세상의 것들-그것이 경제력이든 정치력이든 언권이든 지식이든 이 모든 것의 총합이든-로만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숨으로 대변되는 신적 실체가 결합될 때 비로소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하게 된 데서 비롯된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에게서 오는 숨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은 우리의 선형성(先形成, preformation)의 궁극 기원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시, 교황이 말한 것처럼, 외적인 형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능력이나 언어나 지력이나 그 어떤 것도 인간이 하느님께 받은 숨을 통하여 그분께 닿아 있다는 것, 곧 그분이 궁극 선형성으로서 우리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바로 이런 인간 이해가 인권을 침해하는 정부를 시민들이 교체할 권리를 밝힌 1776년 미국 의회 대표자들의 선언과 “자유와 재산과 안전”에 대한 권리와 함께 “압제에 대한 저항”을 인간의 기본 권리로 선언한 프랑스 혁명이 딛고 서 있는 기초이다. 구체적으로, 후에 미국 독립선언문으로 알려진 이 선언문은 창조자로부터 부여받은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추구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사람들간에 제도화”된 정부가 “그 목적을 파괴하게 되면, 그 정부를 바꾸거나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것은 인민의 권리”라고 천명한다. 이를테면,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 독립선언문의 인간 권리 선언은, 한편으로는 인간이 하느님에게 창조되었다는 신앙 고백을 사회적 관계에서 왜곡했던 교회 지도자들의 인식을 혁파하면서 이를 민중의 사회 관계의 기초로 정립시킨 사회적 토착화의 한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인간 존재 차원에 대한 성찰로 돌아가서 보자면, 위에서 창세기에서 두 번째 인간 창조 이야기를 언급하였는데, 여기에서 하느님이 사람에게 불어넣어 주신 숨을 히브리어로 ruah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희랍어로 pneuma, 라틴어로 spiritus로 표현되었는데, 이 말들은 모두 숨을 가리킨다. 숨을 가리키는 라틴어 spiritus에서 영어 spirit과 spiritual이 오고, 여기서 다시 spirituality, 곧 오늘 우리가 “영성(靈性)”이라고 옮겨서 쓰는 말이 왔다. 이를테면, 인간이 하느님에게서 온 존재인 것을 드러내 주는 하느님의 숨살이, 이것이 영성의 핵이다. 인간의 이 영성, 하느님의 숨성은 존재 차원의 것이다. 이것은 존재의 유형이나 존재의 기법과 연결될 수는 있어도 이런 것들에 한정되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사도들의 저 존재를 건 자유 행위를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이 바로 이 존재의 원천으로서 영성-숨성이다.
숨과 숨성은 인간의 모든 존재 상태와 양상의 원천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에게서 비롯하는 숨성-영성은 인간의 다른 존재 차원들의 밑바닥에서 그것들의 존립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원바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약하거나 강하거나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적일 따름이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하느님의 이 영원의 빛이, 이 하느님적인 것이 복음적으로 건강하게 작용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것이 다른 존재 차원들-지성 감성 땅성 때성에 의해 가려져서 신음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 하느님에게서 온 존재가 하느님을 등질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지성과 감성과 땅성과 때성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이 숨 차원이 간과되거나 거부되거나 파괴되는 바로 여기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하는 “인간학적 위기”의 본질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간이 최우선”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인간 욕구 가운데 하나,” 곧 “소비욕의 존재”로 전도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지성과 감성과 땅성과 때성은 간과한 채 영성에 집착하게 되면, 교황이 말하는 것과 같은 “육신도 없고 십자가도 없는” 영주의(spiritualism)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지성과 감성과 땅성과 때성과 건강하게 통합된 영성을 가로막으면서 영성까지도 대상화하여 장악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고, 인간의 다른 존재 차원을 지배하려는 “영적 세속성”을 낳게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것을 “선으로 포장된 끔찍한 타락”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교회는 자신의 복음화와 토착화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숨으로 사는 존재’라는 곧 하느님의 숨성,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성을 살아간다는 복음적 진리 위에서 수행하게 된다. 이 진리를 안다는 것은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로 작용하고 나타난다. 이를테면 모든 존재가 하느님의 숨으로 산다는 것은 모든 존재가 하느님에게서만 주어질 수 있고 그분의 존재를 통해서만 해명될 수 있는 영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로 호칭할 수 있는 이유인데, 하느님의 살림을 육화시키는 과정에서 부모와 자녀, 교사와 학생, 노인과 청소년, 사제와 평신도, 대통령과 노숙자는 한 부모 아래 한 동반자요 한 스승 밑에 한 제자일 따름이다. 인간이 형성하는 어떤 것도, 지성이든, 감성이든, 문화든, 정치 권력이든, 재력이든, 직분이든 그 어떤 것도 하느님께 받은 숨 앞에 놓일 수 없다. 이것을 모르거나 거부하거나 무력화시키면, 그런 주체는 하느님의 숨에서 멀어지고 그분의 진리에서 멀어진다. 이 영성적 진리에 의하면, 부모가 볼 때 어린 자녀이고 교사가 볼 때 어린 학생 혹은 일진 학생이어도, 이들 역시 부모나 교사의 숨과는 다른, 그러나 명백히 하느님께 받은 숨을 쉬며 살고 있다. 단적으로, 하느님의 창조 이야기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가 매개하는 창조의 숨과 부활의 숨이 온 존재에게 살리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영성적 진리는 이렇게,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복음적 영성적 신학적 현실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이를 따지고 선후배를 따지고 지식의 유무를 따지고 권위를 내세우면서, 어린 자녀, 학생, 청소년, 여자, 보좌 신부를 무시할 수 있다. 어린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청소년이나 젊은 사제들을 아이처럼, 혹은 미성숙한 자로 여기면서 일정하게 배제시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는 주체들은, 스스로 의식하든 못하든, 눈으로 보이는 부모가 자신들에게 보이는 탯줄로 몸을 매개한 신체적 나이나 자신들의 인간 활동의 산물로서 지식이나 권위를 기준으로 신학적 영성적 선형성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될 때, 사무엘이나 다윗은 탄생하기 어렵고, 이런 이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결국 시들고 만다. 이것은 어리거나 무지하다는, 혹은 부족하다는 존재에게만이 아니라 이들에게 존재의 그리고 선형성의 궁극 근원이 되어 주는 하느님에게 역시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또한 위의 “영성적 진리”는 정의를 육화시키는 과정에서 만나는 불의한 세력과 자신에게 물리적 정신적 영성적 사목적 폭력을 가하는 존재들 역시 하느님의 숨성, 하느님의 영성을 사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 존재들이 하느님의 살림 안에서 하느님의 숨으로 살도록 동반할 복음적 진리를 자각하게 한다.
교황은 “어떤 사람의 삶이 하나의 재앙이었다 할지라도, 악습이나 마약이나 그 어떤 다른 것들로 파괴되었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의 삶 안에 계신다”고 말한다. 이것은 권력형 강도로서 사회적 불의와 폭력을 발생시키는 모든 존재들에게도 해당된다. 이들이 범하는 과오는 복음적으로 극복되어야 하고, 이들의 존재는 저 “복음적 진리” 위에서 포용되어야 한다. 이 복음적 진리에 따를 때, 어떤 경우에도 불의한 행위를 한 이들에 대한 비판과 이들에 대한 멸시는 구분되어야 한다. 그들의 악행이 그들에 대한 멸시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들도 하느님의 숨을 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마태 5, 45), 하느님의 빛과 비를 받아 사는, 하느님의 한 집안에서 한 형제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불의를 범하는 존재들에게 형제로서 생명 살림의 길로 다시 돌아올 길을 열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어 “하느님의 영광의 일부를 반영”하게 하는 “인간의 숨성-영성”을 인간의 지-감-땅-때성, 그리고 인간의 경제, 정치, 소통, 학문과 예술 등 인간의 모든 존재 차원과 존재 영역과 통합해서 지켜가는 것을 복음화와 토착화의 한 원리로 얻을 수 있다.
3) 하느님의 살림 안에서 사회 생태
복음화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의 삶의 자리에 육화시킨다는 것은 하느님의 살림이 하느님의 창조계 안에서, 그분이 창조하신 하늘과 땅 사이에서, 우리의 관계 안에서 작용하게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를테면 토착화는 하느님의 존재 전달로 시작되고 신앙 살이를 통한 우리의 존재 전달로 우리의 토착화가 이루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살림의 육화로서 복음화는 근원적으로는 하느님의 존재 전달을 동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진정한 복음화와 토착화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한 사랑과 섬김의 존재 전달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서는 토착화로서 복음화와 복음의 육화로서 토착화가 서로 교환 가능하다. 앞에서 언급한 토착화의 위계에서 낮은 것으로 토착화하는 데서 그쳐서는 교회의 존재가 위축되고 복음적 일관성의 규모가 작아진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충만한 부요는 학자, 노동자, 기업가, 예술가와 모든 사람을 통합”시킨다고 말한다. 복음의 깊은 토착화일수록 이러한 통합의 폭과 깊이가 확장되는데, 복음의 사회 내 육화로서 사회적 토착화에는 노동자와 기업가, 학자와 예술가가 참여하는 이를테면 경제와 학예 영역이 모두 포용된다.
교황은 복음이 민중의 “기도, 형제애, 정의, 투쟁, 축제의 표현 안에” 육화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여기서 “정의, 투쟁, 축제”에는 보다 더 직접적으로 경제와 정치가 연관되는데, 그는 “어떠한 교회 공동체든, 가난한 이들이 품위있게 살고 아무도 배척당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협력할 사명을 일깨운다. 그리하여 경제가 “어원-oikonomia-이 가리키는 대로, 우리가 함께 사는 집인 이 세계 전체를 적절히 관리할 수 있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에게서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매우 숭고한 소명이고 사랑의 가장 고결한 형태”인 “정치”가 사회 복음화 안에 기본적으로 포용된다. 실제로 교황은 “초월적인 것에 대한 열린 마음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져올 수 있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새로운 정치 경제 사고방식”이라고 말하는데, 그에게서 “정치 생활에 대한 참여”는 모든 그리스도인 시민들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도덕적 의무”이다. 또한 이런 관점에서 그는 개인적 사랑을 넘어서 “사회적 사랑”을 요청하고, 이런 사회적 사랑의 구체적 형태로서 “정치적 사랑”의 실천을 “우리의 영성의 일부”로 명기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개인적 사랑에서 사회적 사랑으로 복음 살이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거리의 진흙탕에 신발이 더럽혀지더라도 좋은 일을 하”는 것을 복음을 사는 길로 진술하는데, 최근에 그는 자신의 이러한 입장을 정치 참여와 연관지어 진술하였다. 그는 말한다. “정치는 애덕의 가장 숭고하고 가장 절박한 형태”라는 바오로 6세 교황의 말을 인용하면서 “정치에 직접 투신하는 것을 기피한다면, 그것은 이 세계에서 소금과 빛이 되라고 불린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의 미션을 배반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최근에 한 남성 신자가 교황에게 “좀더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할 의무와 신앙 사이의 연결 고리를 어떻게 하면 더 단단하게 할 수 있느냐”는 물음을 제기하였다. 그러자 교황은 “부패로 얼룩진 정치의 한가운데서 손과 마음을 더럽히지 않기란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께 죄를 짓지 않게 해달라고 청하고, 만일 손이 더러워졌다면 용서를 빌면 된다”면서,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정치에 참여하기를 당부했다.” 교황은 “온갖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치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다는 현실에 공감”하면서, “매일 공동선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일종의 순교와 같다”고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신이 직접 “사회 상황과 국민과 가난한 이들의 삶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정치인들을 더 많이 보내 주시도록 기도”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사회적 사랑이나 시민적, 정치적 사랑은 이런 관점을 사회 관계 속에서 실현해 가는 구체적 방식이다.
이와 함께 사회와 문화 현상 가운데 하나로서 통합적 사회 생태를 실현하는 데 포용해 들여야 할 것이 언론이다. 교황은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에 언론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친구”로 부르면서,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커뮤니케이션의 삼위일체로 말한 적이 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우리 교회 역시 “우리 자신이 아니라 이 삼위일체,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소통시키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복음화와 토착화 안에 언론 영역이 필수불가결하게 포용된다는 것을 뜻하는데, 2015년 6월 27일자로 발표한 자의교서를 통해서 바티칸 공식 기구로 커뮤니케이션 총괄 조직(The Secretariat for Communications)을 세운 것은 그의 이같은 인식을 증거한다. 교황은 “영혼이 있는 간호사, 영혼이 있는 교사, 영혼이 있는 정치인”을 말하는데, 여기에 “영혼이 있는 경제인, 영혼이 있는 언론인”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교황은 “영혼이 있는 신앙인”으로서 자신을 “이 땅에서 한 사명”으로 인식한다. 그런 가운데 “빛을 비추고, 복을 빌어 주고, 활기를 불어넣고, 일으켜 세우고, 치유하고, 해방시키는 이 사명으로 날인된” 존재로 인식하도록, 곧 영혼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이것은 하느님께 부여받은 영혼을 통하여 그분이 우리에게 심어놓으신 당신 살림의 질서를 인식하고 살아갈 능력이 주어져 있음을 전제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경제와 정치와 언론과 학예 모든 영역을 하느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와 이어 놓을 그리스도교 종교 차원을 식별하게 된다.
위에서 인간 생태를 보면서 사람의 몸 상태와 존재 과정과 연결하여 사회적, 문화적 활동 영역으로 경제, 정치, 언론, 학예, 종교 다섯 영역을 확인하였다. 이것은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가 본래적이고도 존재적으로 교직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이 다섯 영역은 근원적으로 하느님의 살림(oikonomia Dei)에 속하고, 앞에서 본 것처럼, 인간의 기본 존재 과정과 맞닿아 있는데, 이것은 인간 생태의 골간이 사회 생태로 발현된다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의 이 통살림은 하느님의 경제(economia Dei), 하느님의 정치(politica Dei), 하느님의 언론(revelatio 혹은 communicatio Dei), 하느님의 교육(revelatio 혹은 educatio 혹은 pedagogia Dei), 하느님의 종교(religio Dei)로 분화된다. 그분이 먼저 경제하시고 정치하시고 언론하시고 교육하신다. 종교는 그분의 숨에서 비롯하여 그분을 향해 있기 때문에 그분이 “종교하신다”는 말은 그분의 숨살이를 가리키는 말로 쓸 수 있다. 또한 인간이 그분에게서 와서 그분을 향하는 과정, 그분과 다시 이어 사는 과정을 “종교”라는 말로, 곧 re-ligio로 표현할 수도 있다. 하느님의 경제는 그분의 집안 살림(oikos-nomos)이고, 하느님의 정치는 그분의 도시 살림(polis > politicos)이며, 하느님의 언론은 그분의 존재 전달로서 생명 살림의 소통(communicatio)이다. 하느님의 교육은 창조와 구원의 전 과정으로서 온 생명 살림에 대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일깨움과 인간의 체득 과정으로 나타난다. 하느님의 이 원교육에서는 하느님 자신이 교사이고 텍스트이며, 그분이 계신 곳이 학교이므로 그분이 곧 학교다.
이 다섯 영역에서 모든 사람은 자기 꼴대로 자기 방식대로 자기 존재 상태에 따라 고유하게 자신의 몸과 손과 발, 입과 귀, 눈과 뇌, 숨을 통하여 존재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원 경제, 곧 그분의 집안 살림과 그분의 원 정치, 이를테면 하느님의 도시 살림에 참여한다. 또한 그분의 존재 전달로서 소통과 교육에 참여하게 된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이 당신의 존재와 생명과 노동과 쉼에, 그리하여 당신의 살림과 소통과 교육에 참여할 가능성을 부여하셨다. 실제로 인간은 자신의 몸과 자신의 가장 기본적인 일을 통하여, 곧 자신의 존재 과정을 통하여 하느님의 이 다섯 영역과 상관되어 있고 또 그 영역에서 자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하느님의 살림의 육화로서 복음화와 토착화와 연관된 영역을 인간의 숨성과 숨살이와 관련하여 진술하면서, 이것과 맞물려 있는 존재 차원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인간은 코와 폐로 숨쉬고, 입과 귀로 말하고 듣는다. “손일” “발품”이라는 말에서 감지할 수 있는 것처럼 손과 발을 통해서 일하여 밥을 먹고, 머리로 생각하고 성찰하며, 몸과 몸이 만나서 관계를 형성한다. 입과 귀와 연관된 말과 몸과 몸이 관련된 짝과 손발과 연관된 밥과 머리와 관련된 생각과 앎 모두는 상대적으로 인간의 기관들이 수행하는 활동의 산물이다.
위에서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과정에서 모든 인간이 갖는 신체 기관과 수행하는 활동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가 상관되어 있음을 말하였다. 사회적 토착화에서 이 상관성을 인식하고 삶에서 살아가는 것이 관건을 이루는데, 아래에서는 이를 좀더 면밀하게 추적하기로 한다. 먼저 인간이 갖는 신체 기관과 그 기관의 작용을 연결해 보면 다음과 같은 다섯 연결체를 얻을 수 있다. 말-입귀-소통, 몸-짝-관계, 밥-손발-일, 앎-뇌-성찰, 숨-코-믿음. 이 각 영역은 일차적으로 지성과 감성과 땅성과 때성과 영성과 연결된다. 이 가운데 특히 숨-코-믿음-영성이 연결되는 것은 좀더 설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숨의 경우 우리가 받은 코로 들이쉬고 내쉰다. 인간의 코와 폐가 작용하기는 하지만, 숨을 쉴 수 있게 하는 공기 혹은 산소는 숨을 쉬는 주체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공기-산소는 받는 것이고, 주어지는 것이다. 받는 것, 주어지는 것이 자신을 살리는 것이라는 믿음 없이는 숨을 쉴 수 없다. 자신은 믿음이라는 의식 없이 숨을 쉰다고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숨을 쉬는 것은 믿음 행위이다. 자기를 살게 하는 그것에 대한 신뢰가 우리의 숨 활동에 작용하고 있다. 이 보이지 않게 주어지는 것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응답이 받는 것에 대한 감사와 믿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들은 각각 말의 소통을 통한 혼의 자유와 몸과 몸의 관계를 통한 차이들의 공명과 일을 통해 얻은 밥의 공유를 통한 감사 축제와 성찰로 얻은 앎을 통한 충실한 창조, 그리고 믿음의 숨살이를 통한 존재의 바닥되기를 지향하게 된다. 말-몸-밥-앎-숨이 입귀-짝-손발-뇌-코와 상관되고, 이것들이 다시 소통-관계-일-성찰-믿음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사회 활동 영역으로 구체화되면 언론-정치-경제-학예-종교로 나타나고, 이 영역을 주관하는 주체가 신문방송-정부-기업-학교-교회로, 그리고 이 영역에서 수행하는 활동이 여론-공동선-이윤-교육-경배로 나타난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성과 나이와 재산과 신분과 언변과 지식과 신앙과 관계없이 자기 모습대로 경제인이며 정치인이며 언론인이며 학예인이며 종교인이라는 것을 뜻한다. 모든 인간은 유아든 무직자든 중학교 일진 학생이든 사회복지사든 대학 신입생이든 교수든 일용직 노동자든 대기업 회장이든 관계 없이 인간 존엄 면에서 차이와 차등과 차별이 있을 수 없는 주체로 존재한다. 이들은 모두 예외 없이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관계의 규모 면에서 차이와 차등과 차별이 있을 수는 있어도 기업과 정부와 언론사와 학교와 교회 실재와 다양한 형태로 상관되어 있고, 그러므로 기업인, 정부 공무인, 언론인, 학예인, 종교인과도 직간접으로 상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를 들자면, 복음의 기쁨과 찬미받으소서가 발표되자 대기업들과 정치인들 사이에서 나타났던 것과 같은 식으로 신앙인은 정치적이어서는 안된다거나 종교인이나 교육인들 가운데 자신은 정치적이지 않다거나 하는 말은 이런 인간 존재 구조에서 이미 그 자체로 모순이다. 정치적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어떻게 정치적인가가 관건이고, 정치를 어떻게 복음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 핵심 관심일 따름이다.
이 각 영역은 단선적이 아니라 복선적인 형태로 표출된다. 이를테면, 말-입귀-소통-언론-신문방송-여론, 몸-짝-관계-정치-정부-공동선, 밥-손발-일-경제-기업-이윤, 앎-뇌-성찰-학예-학교-교육, 숨-코-믿음-종교-교회-경배는 양면성을 띤다. 말-몸-밥-앎-숨 모두 거친 것이 있고 부드러운 것이 있으며, 거칠면서 부드러운 것이 있고 부드러우면서 거친 것이 있다. 말도 몸도, 밥도, 앎도, 숨도 모두 생기나게 하는 것도 있고 질식시키는 것도 있다.
구체적으로 한 예를 들자면, 교육에는 살리는 교육도 있고 죽이는 교육도 있다. 교육을 긍정적인 것으로만 알거나 내면화를 선의의 것으로만 알면, 교육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뜻한다. 교육과 내면화는 긍정적인 것만이 아니라 폭력적이고 파괴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있는 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추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교육과 내면화를 긍정적인 것으로만 알게 하는 존재들은 위험하다. 이들은 교육 낭만주의에 사로잡혀 있거나 교육 폭력을 계획하여 관철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거나 두 경우 가운데 한쪽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다섯 영역은 모두 복선 구조를 갖는데, 말은 대화와 독단으로, 정치는 연대와 폭력으로, 경제는 공유와 독점으로, 학예는 상호 배움과 주입으로, 종교는 수행과 오만으로 나타날 수 있다. 사회적 토착화로서 하느님의 나라의 육화에서 이 세계의 경제와 정치에 무관심할 수도 없지만 무관심해서도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복음의 기쁨 2장에서 “시대의 징표”를 읽으면서 오늘의 세계의 위기, 오늘의 세계의 도전들을 식별하여 공유하고, 찬미받으소서 전체를 통해서 오늘의 지구 생명과 인류 공동체가 직면한 생태적 위기가 정치와 갖는 상관성을 조명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만이 아니라 지구 온 인류 공동체와 생명 공동체에게 역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섯 생활역과 관련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의 생태 회칙 가운데 “통합적 생태”에 관해 진술하는 4장을 마련하여 인간 차원과 사회 차원을 모두 포용하는, 곧 부분적이지 않은 통의 생태를 요청한다. 그는 여기서 “환경적, 경제적, 사회적 생태”는 물론, “문화 생태”와 관련해서도 진술한다. 또한 5장에서는 학문과 종교의 대화에 관해서 진술하기도 한다. 우리는 여기서 사회 생태를 구성하는 경제, 정치, 학문(과 예술), 종교 네 영역을 명시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여기에 위에서 본 언론을 더하여 인간 생활의 기본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다섯 생활역을 구축할 수 있다.
이 다섯 생활역 가운데서 복음의 기쁨 특히 2장에서 위기와 관련하여 다루면서 경제 영역에 대해서 진술하고, 4장에서는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과 관련하여 가난한 이들을 중심에 놓고 경제와 정치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진술한 적이 있다. 지배하는 정치와 경제는 공동선과 창출되는 부에 참여할 수 있는 규모를 좁혀서, 배제의 경제, 노동과 정치 주체들의 주변화(marginalization)와 비인격화(impersonalization)를 유발시킨다. 노동과 연대의 결실을 소수 특권층이 독점하면서 결실을 이루는 데 참여한 주체들을 사회적으로 신음하게 하고 분노하게 만든다. 교황이 오늘 우리 시대의 도전들을 진술하면서 “배제의 경제”와 “돈의 우상화,” “지배하는 금융,” “폭력을 낳는 불평등”이 현실에서 나타나는 것을 직시하게 하면서 이를 극복할 것을 요청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교황은 미디어의 죄 세 가지를 불충분한 정보와 중상과 명예훼손으로 들면서, 이 가운데 가장 큰 죄는 불충분한 정보라고 말한다. 교황은 뒤의 두 죄, 중상과 명예훼손의 경우 행위의 주체들이 자신들의 행위가 불의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후에 이를 참회하고 돌아설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불충분한 정보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은 말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실상의 반만 말함으로써, 이런 정보를 접한 주체들이 충분한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이것이 다른 두 죄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죄가 된다는 것이다. 교황은 불의한 경제와 정치가 언론을 도구화하여 민중이 권력자들의 지배와 독점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자신들이 겪는 고통과 비인격화 현상을 제대로 식별하지 못하게 만들어 온 현실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다.
불의한 경제와 정치는 교육 역시 도구화한다. 돈의 우상화와 지배하는 금융 체제 아래서 불평등의 구조를 조장해 온 경제인과 정치인들은 가난한 존재들이 자신들의 경제와 정치 행위를 통하여 이런 불의 구조에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데 학문과 학교와 교육을 이용한다. 그리하여 “이들을 진정시키고 길들여 해를 끼치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교육”을 공교육 체제 속에서 관철시키려 한다. 이것은 교육이 긍정적인 것이라는 환상을 극복할 과제를 지시하는데, 교황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하여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주변으로 밀려나서 비인격화된 이들의 입장에서 이러한 현실을 이렇게 아파한다. “수많은 나라에, 그 나라의 정부와 기업과 기관 안에, 그 지도자들의 정치 이념이 무엇이든지간에, 매우 널리 퍼져 있고 깊이 뿌리박혀 있는 부패가 사회적 암 덩어리들로 자라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교황은 “비판적 사고를 가르치고, 도덕적 가치들 안에서 우리가 성숙하는 길을 제시해 주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모든 생태 위기는 필연적으로 경제 정치적이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교육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사회의 이같은 구조성과 입체성을 자신의 신앙 해석과 실천에 복음적으로 통합하지 못할 때, 필연적으로 “높고 먼 데에서(above and afar)” 민중이 직면한 현실을 바라보게 된다. 이렇게 민중의 존재장에서 동떨어진 시각을 갖고 있을 때, 그 결과는 하느님의 존재장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그 결과는 단순히 민중과 멀어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역시 멀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교황은 이러한 상태에서 이들이 “영적 세속성”에 빠져들게 된다고 말한다. 이들은 “복음화하는 대신에 남들을 분석하고 분류하며, 은총의 문을 열기보다는 검토하고 검증하는 데에 자신의 힘을 소진”한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나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참다운 관심이 없다.” 이런 사람들은 민중의 존재장에 충실한 “형제자매의 예언을 거부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을 무시하고 다른 이들의 잘못을 계속 들추어내며 겉치레에 집착한다”고 하였다. 이들은 “자기 내면과 관심사에만 제한된 지평에 갇혀 있”으면서, “자기 죄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용서에 진심으로 열려 있지도 못한다”는 것이 교황의 진단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은 교회의 “영적” 지도자 위치에 있으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이렇게 해야 한다’는 말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끝없는 환상에 빠져 우리 신자들의 고통스러운 현실과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당신의 집(oikos)을 지으시고, 동아시아 선조들은 그것을 집 우(宇) 집 주(宙)를 써서 우주(宇宙)라 이름하였다, 그 집에서 만물이 제 꼴로 있게 하셨다. 당신이 있게 하신 만물 가운데 땅에서 풀과 나무들이 제 종류대로 나서 자라게 하시고, 바다와 하늘을 집의 집으로 삼아 바닷것들과 날것들이 제 종류대로 있게 하셨다. 그리고는 땅에서 사는 것들, 들집승과 집짐승과 기어다니는 것들을 제 종류대로 있게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남자와 여자로 사람을 있게 하시어 먼저 있으라 하신 것들과 함께 살게 하시고 당신이 있게 하신 모든 것들을 보시고 “참 좋다” 하셨다(창세 1, 1-31). 이렛날에는 당신의 창조를 마치시고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과 함께 쉬셨다(창세 2, 1-4). 이때 이래 사람들은 하느님의 살림 안에서 자신들에게 존재의 바닥이 되어 주는 온 창조물과 함께 온 창조물을 통하여 하느님의 숨으로 그분의 숨살이를 지향하는 가운데 한 존재장 안에서 한 존재장을 공유하며 살아 왔다. 인간은 이 한 바닥 위에서 온 창조물의 생명의 뿌리 하느님과 그분께 창조된 생명의 이웃인 온 창조물과 하느님의 모습을 공유하는 동료인 온 인간과 더불어 살고 있다. 이 존재 여정이 위에서 본 것과 같은 형태로 밥-일-손발-경제, 몸-관계-짝-정치, 말-소통-입귀-언론, 앎-성찰-뇌-학예, 숨-믿음-코-종교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살림을 자기의 삶의 자리에 육화시키는 투신을 이 영역들의 상호 관련성 위에서 기획하고 이 영역들을 복음적으로 통합시켜 가는 것을 토착화의 한 원리로 식별할 수 있다.
4. 맺으면서
토착화는 하느님이 먼저 이루신다. 하느님이 당신의 존재장에서 당신을 전달해 주시는 과정이 그분의 토착화이다. 창조는 하느님의 살림의 육화로서 하느님의 존재 전달이라고 할 때, 창조의 전 과정이 하느님의 토착화로 나타난다. 이것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creatio continua). 구원은 하느님의 존재장 안에서 우리를 포함하여 당신의 온 창조물에게(societas-cultura) 하느님의 살림을 매개하기 위하여 이루시는 하느님의 육화(incarnatio)를 통하여 실현된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 역시 하느님의 존재 전달로서 그분의 토착화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 역시 지금도 진행 중이며 미래에 열려 있다.
이 하느님의 살림의 규모를 어떻게 알아듣고 어떻게 응답하는가? 이것이 신학의 규모와 깊이로 나타난다. 하느님의 살림의 규모를 좁히면, 신학과 영성과 사목의 규모는 그만큼 협소해진다. 옛 신학 패러다임에서는 세상과 창조계에서 멀어질수록 신학이 순수하고 경건하다고 여겨졌으나, 오늘 우리 시대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회적 토착화에서는 이런 신학은 하느님의 살림을 한정짓고 찬양의 연대의 규모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건강한 신학 비전을 갖추기 위하여 하느님의 저 원살림의 규모가 3중의 통합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았다. 첫째가 하느님의 삼위일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온살림, 하느님의 통살림에 참여하는 창조계의 구성체로서 자연 생태와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 사이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삼생태의 통합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삼위일체에 대비된 “창조물 사이의 삼위일체”로 말할 수 있다. 둘째로, 모든 인간이 모든 인류와 더불어 공유하는 신성이 자연 생태와 사회 생태와 유기적 연관 속에서 이루는 지성과 감성과 땅성과 때성과 영성의 통합을 볼 수 있었다. 셋째가 사회 생태의 존재장에서 5생활역, 경제, 정치, 언론, 학예, 종교가 인간 생태와 자연 생태와 이어진 형태로 이루는 통합적 지평을 살펴보았다.
5생활역 가운데 경제는 인간이 손으로 대변되는 전 존재를 통하여 자연 생태와 사회 생태와 관계 속에서 이루어가는 문명의 핵이자 총체를 말한다. 인간은 농업 혁명과 기계 혁명과 자동화 혁명과 컴퓨터 혁명을 매개로 각 인격 주체와 인류 사회와 지구와 우주 생태를 시대마다 변화시키면서 인간-사회-자연 생태를 새롭게 재구조화해 왔다. 이 과정이 특히 경제와 문명으로 식별되어 왔는데, 최근에는 사물인터넷(IOT: Internet of Things) 영역과 더불어 뇌과학과 기술 공학을 통합한 로봇 인간의 정교화가 새로운 경제 지평에서 추구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어떤 결과가 발생할 것인가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신들이 쉬게 하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다는 신화의 주체들과 사물 인터넷과 인간 로봇을 만들어 인간이 바라는 일을 하게 하려는 오늘 21세기 인간 무리가 노동과 쉼의 근본 주제 의식에서 만난다. 인간을 노예화한 신들과 이들의 지위를 인간 사회에서 정당화한 집단들이 이것을 지배로 쓰려는 오늘의 인간 집단과 상통한다. 존재의 원천에서 노동과 쉼을 존재의 축복으로 공유하려는 이스라엘의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은 이것을 인간화하려는 존재들과 상통한다. 노동과 쉼을 공생의 길로 이루어 가는 것, 이것이 창세기 저자들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거쳐 오늘의 프란치스코 교황에 이르기까지 한 목소리로 호소해 온 이른바 하느님 살림 안에서 이루는 “인간화”이다.
정치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모체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지배 종속으로 전도시킬 것인가 한 뿌리에 닿은 존재들의 공명에 근거하여 형제애를 사는 관계로 승화시킬 것인가를 선택해 가는 과정이다. 언론은 진리를 덮을 것인가 드러나게 할 것인가, 그리하여 불의와 환상과 분노를 유통시켜서 대립하게 할 것인가 진리를 소통시켜서 서로를 이어 줄 것인가를 놓고 자신의 존재를 걸어 왔다. 학예는 불의한 지배를 정당한 것으로 주입할 것인가 생명의 주재자 하느님이 각 존재에게 부여하신 그것이 그것으로 살도록 길이 되어 줄 것인가를 선택해 가는 과정에 있다. 종교는 온 존재가 하느님에게서 받는 숨을 질식시키는 데 참여하여 거친 숨을 발생시킬 것인가 그분께 받은 숨을 제 꼴대로 쉬게 하는 일에 참여하여 온유한 숨을 발생시킬 것인가를 선택해 왔다.
하느님의 숨들이 모여서 그분의 살림에 함께 참여하여 감사와 찬양의 연대를 이루며 그분의 숨들이 그분의 숨답게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숨으로 지켜 갈 길을 걸으며 이것이 복음적으로 사회에 육화되도록 동반하는 것이 요청된다. 바로 여기에 오늘 우리 교회의 사명이자 축복이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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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신부님과 김영진 신부님, 정홍규 신부님, 장수백, 서동신 신부님 등과 배미향, 김준희, 김영주 수녀님, 맹영선 선생님, 임선영 선생님, 대구 곰네들 가족들, 양병주 선생님, 그리고 수도권과 지방 여러 곳에서 2006년 3월부터 2011년까지 이어갔던 생태영성공부모임에 참여한 모든 분들, 그리고 원주의 이환 형제님과 오양순 자매님을 비롯해서 참으로 따뜻하게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2009년 가을부터 골롬반 선교센터와 정동 프란치스코교육관에서, 그리고 서울대교구와 수원교구, 대전교구, 광주대교구 여러 본당과 장성 프란치스코의 집 등 여러 기관에서 생태영성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생태영성 비전을 형성하고 나누는 과정을 동반해 준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린다. 2010년부터 지금까지 멍석 모임에 참여해 오는 모든 동반자들, 그리고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생태영성과 토착화” 1, 2에 참여해 준 대학원생들과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생태영성 기초”에 참여해준 4-7학년 학생들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또한 전국의 수도자들과 함께 생태영성 비전을 나누면서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축복을 기억하면서 수도자들의 동반에 깊은 감사와 존경을 드린다.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여정을 통해 생태영성을 하느님의 통살림으로 알아듣고 이를 우리의 존재장에 육화시키기 위해 노력해 온 한 결실이 이 작업에 통합되어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러날 수 있는 모든 부족과 한계는 나에게서 비롯하는 것임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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