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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암사에서 시 쓰기 / 박남준 (1957-)
    현대시/한국시 2010. 4. 17. 12:08

    선암사에서 시 쓰기 / 박남준 (1957-)


      선암사에 갔습니다. 구례을 지나 산동을 지나 조계산 선암사 가는 길가엔 봄날의 햇살을 터뜨리면 저러할까 노오란 산수유꽃빛 처연해 보입니다. 문득 가까이 혹은 멀리 여기저기 산자락에 희고 연붉은 매화꽃, 사태처럼 피어나서 차창을 열지 않아도 파르릉 거리며 매화 향내 날아든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꽃빛에 따라서 들고 일어나는 마음이 변덕을 부리는 것을 보며 씁쓸한 자조가 파문져왔습니다.


      산문에 들었습니다. 봄날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는 산빛 쇠락한 풍경, 언제 가보아도 눈에 띄게 화려하지도 웅장하여 주눅이 들게 하지도 않는 선암사는 한폭 담담한 수묵화 같아서 그때마다 가만히 고개 숙여집니다.


    고답스런 산사 그 한편을 스르릉 열고 지허 스님이 차를 우려내시며 건네는 말씀, 어려운 시를 쓰느냐고 시는 참 어렵더라고, 스님들 중에도 더러 시를 쓰는 이들을 보았는데 선방에 들어 참선을 하시다가도 불쑥 불쑥 일어나 시상이 떠올랐다며 지대방으로 나가시는 걸 보았다고 한 이십년 참선을 하며 기다렸다가 시를 써보면 어쩔까 하시는 말씀, 그 말씀 나를 일러 가리킨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참 부끄럽고 부끄러운 그야말로 할! 이었습니다. 언제 다시 선암사에 가서 스님의 그 말씀 몸서리쳐질 때까지 살아볼 일입니다.

    출전: 창비시선 138, 박남준 시집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2000년


    **저자소개**

    1957년 전남 법성포 출생. 전주대 영문과 졸업.

    1984년『시인』제2집에「할메는 꽃신 신고 사랑노래 부르다가」외 7편의 시로 활동 시작.

    1990년 첫 시집『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간행.

    1992년 두 번째 시집『풀여치의 노래』간행.

    1993년 산문집『쓸쓸한 날의 여행』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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