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이저 위원회의 청문회에는 당시 해외망명중이었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직접 출석해서 박정희 정권의 치부에 관한 여러가지 증언을 하였다.
도널드 매케이 프레이저 의원을 중심으로 마이클 해링턴, 에드워드 더윈스키 의원이 작성했다. 그래서 보고서의 이름이 프레이저 보고서이다.
1977년 11월 29일에 위원회가 작성한 프레이저 보고서에는 단순히 당시 한국의 경제 정책에 관한 이야기만 담긴 것이 아니라,
박정희가 어떤 인물인지, 어떻게 정권을 잡았는지, 어떤 정책을 쓰고 있는지 등 박정희 정권의 모든 것이 담긴 보고서라서 미 의회에서 파장이 컸다. 총 447쪽의 분량으로, 내용 중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친위조직인 중앙정보부를 통해 정권에 유리하도록 음지와 양지 양면에서 미국사회(!)를 조종하려고 했다는 내용과
이걸 위한 수단인 박정희의 비자금과 비자금 조성방법에 관한 내용이 있다.
보고서에는 남한 측에서
백악관 내부에 정보망을 심고 미국 의회 및 뉴스, 성직자, 교육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계획을 획책했다는 내용과 더불어, 또한
통일교의
문선명에 관한 내용,
중정[1]이 통일교 신도들을 미국 의회 사무실에 자원봉사자로 취직시켜 통일교를 미국 내 정치공작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한 정황, 중정과 통일교가 ‘한국문화자유재단’(Korean Cultural Freedom Foundation)이라는 비영리단체를 조직해 남한 입장을 대변하는 선전수단으로 써먹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참고. 그러니까 미국 정부가 한국에 해 온 방식을 배워 한국정부가 미국에 써먹으려 했다는 말.
감히 천조국을!또한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통일교가
리처드 닉슨을 지지하는 활동을 편 것과 중정이 관계가 있는지 여부도 조사했으며, 중정이 정치적 목적의 영향력 확대를 위하여 미국의 대학교에 돈을 뿌리려는 계획을 세웠고 재미 한국인들에게 남한 정부의 방침에 반대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며 협박한 사실을 폭로했다. 박정희 정권을 매우 비판적인 어조로 서술했기 때문에 유신정국은 이것을 거짓이라고 주장하고 무시했으며 국내에서 보고서 내용이 보도되지 않도록 통제했다. 그러나
빌 클린턴 행정부 때, 비밀유지기한이 지나 비밀해제되었고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보고서 한편에서는
(70년대 들어 수립된) 3차/4차 경제개발계획은 미국의 자문이 없었으며, AID의 공헌도 미약했다고 기술하였다.(The Korean Government formulated its Third and Fourth Five-Year Plans with virtually no U.S. advisory assistance, and the AID contribution to the implementation of these plans was minor, 181페이지) 실제 포항종합제철소의 건설만 해도 미국이 반대하였다.
[2] (사실, 미국은 1차 경제개발계획때 원조자금으로 짓는 화학공장 건설때도 한국에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다는 식으로 낮게 보고 딴죽을 잘 걸었다. 그 때 한국측에서는 미국측을 대놓고 비토했다가는 예산이 안 나오니까 슬쩍 핵심시설의 용량만 키워 짓고 나중에 큰 공사 없이 주변 시설을 키워 전체 생산량을 늘리는 식으로 대응했다.
[3])
민문연의 동영상에서 언급된 미국 만능론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근거로 삼고 있는 대부분의 문서는 사실 프레이저 보고서가 아닌 여러가지 단편적인 외교문서이다. 보고서에서 간접적으로 기술되어있는 1차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미국이 좀 더 주도(사실 장면정부 때부터 개입)했으나, 이어지는 경제계획 수립에 자문(그 마저도 3차/4차는 자문도 없었다.)을 넘어서는 역할을 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미국은 1961년 한 해에만 2.61억 달러가량을 한국에 투자하였다.(프레이저 보고서 163쪽 참조.) 총계 2.61억중 재정지원 1.76억이고 다른 여타 지원이 포함된 추산금액이다. 2.61억 달러를 당시 환율로 계산하면(
달러당 1300환)3393억환에 해당한다. 1961년 한국의 정부예산은 5050억4만환으로 한 해
국가예산의 2/3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 금액은 2011년기준 43억달러에 해당(
근거)하는 돈으로 2011년 환율로 4.8조원에 달한다. 물론, 이들의 지원이 한국의 공산화를 우려한데서 시작되었지만,
재정지원을 넘어선 국가 개발플랜의 제공 또한 지원한 것으로 보고서에 나와있다.
[With the concurrence of AID, Park concluded that an import substitution strategy was not in Korea’s long-term interests. Economic success could be better achieved by pursuing an export-led economy based on labor-intensive industries which would use the substantial numbers of unemployed and underemployed workers. This strategy, along with the implementation of some AID-inspired reforms, led to a more than doubling of export earnings—to about $80 million—and a 17.7 percent increase in domestic revenues in the period 1961 to 1963.]
161~2 페이지 일부 참조 발췌AID와 박정희가 의견을 타협한 결과는, 수입대체전략은 한국의 장기 전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경제적 성공은 실업자와 일거리가 충분치 않은 노동자를 활용한 노동집약적 산업에 기초한 수출주도경제를 추구함으로써 더 잘 성취될 수 있었다. 실행면에서 AID의 조언을 받아 개선한 이 전략은, 1961~63년 사이 수출을 두 배 이상(8천만 달러)으로 늘렸고, 국내 시장도 17.7% 늘리는 결과를 냈다.
그리고 프레이저 보고서는
[...이러한 놀라운 성과는 최우선적으로 교육받고 근면한 한국의 국민들 때문이었으며, 이는 한국이 가진 훌륭한 국가적 자산이다. 한국 정부는 단호한 결의로 경제를 지도해 경제성장을 이끈 공로가 있다.] 라고 한국의 성과를 치하하는 한편,
[A number of factors contributed to this remarkable achievement. Foremost were the Korean people themselves: Educated, industrious, disciplined; they were Korea's greatest natural resource. The Korean Government deserved credit for having placed a priority on economic growth and directing the economy with firm resolve.
205 페이지 일부 참조 발췌]
[1960년대의 미국 정부의 한국 성장에 대한 기여 역시 매우 지대하였으며, 미국의 경제적 지도가 한국의 경제 성장에 전적으로 기여하였다.]고 보고서의 경제 분석 파트의 결론 편에 서술되어있다.
[The role of the U.S. Government was significant, too. In the 1960’s, economic assistance was the major source of funding for industrialization, and both economic and military assistance freed Korea from a substantial portion of the defense burden. At the same time, AID officials were integrally involved in Korea’s economic planning, helping to formulate projects and programs and urging necessary and unpopular institutional reforms. U.S. training of Korean economic and administrative officials also contributed to the success.
205~7 페이지 일부 참조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