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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좋은 시인이 되는 길 / 강은교현대시/시창작 관련 2009. 9. 11. 14:25
좋은 시인이 되는 길 / 강은교(시인․동아대 교수)
저는 우선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 자신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았으면 합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또 자신에게 해답을 구한다는 점에서 문제 해결의 빛을 끄집어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잠깐씩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무보상, 무보수의 시간을 일주일에 한 시간이라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해지지 않을까 합니다.
먼저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십시오. '나는 오늘 몇 번의 전율을 경험했는가? 정신과 살의 스파크, 또는 전기가 찌르르 흐르는 듯한 전율(戰慄)을 몇 번이나 느꼈는가?' 제 경우에도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아름다운 선율 한 가닥 앞에서도 왜 그렇게 떨렸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곡들을 들을 때는 더 그랬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에게 그런 정서가 깃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술의 최초의 단계는 부르르 떠는 데서부터 시작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참 많습니다. 더 심한 말로 표현을 하면 경련, 발작 같은 것들이 예술의 초입이지 않는가 합니다. 예를 들어 남자의 경우에는 아주 예쁜 여자를 봤을 때는 온몸에 전기가 쫙 흐르듯 한다고 하지요. 예술 쪽으로 시선을 옮겨 보면, 예술적인 대상을 만났을 때 전기가 찌르르 오는 게 그 최초의 단계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시는 언어의 경련과 같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길게 쓰기보다 어떤 대상에서 짧게 그 무엇인가를 직관적으로 포착해 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야말로 어떤 전율이 들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떤 시를 보면 전기가 부르르 올 때가 있지요. 예를 들어서 김수영의 「풀」을 맨 처음 읽었을 때, 서정주의 어떤 시를 맨 처음 읽었을 때 전기가 부르르 온 경험을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어떤 대상과의 감동적인 교감에 따라 전기가 부르르 온다면, 일단 그 사람에게는 시를 쓸 소질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대상을 만나 스스로 전율을 느끼는 경우가 참 많다고 하면, 그 사람은 시를 쓰라는 겁니다. 저는 그것이 시인으로서의 품성을 가늠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술의 최초의 순간은 바로 그러한 전율에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800년대 미국의 사상가로 「월든(Walden)」(「숲속의 생활」로 번역 출간)의 저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 Henry David Thoreau)는 명문 하버드 대학을 나왔지만, 도시에서의 번잡한 삶과 재산을 버리고 진짜 무소유가 되어서 월든 호숫가 숲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손수 통나무집을 지어서 살았고, 숲속의 땅에 밀을 심고 스스로 반죽해서 만든 빵을 먹고 살았습니다. 옷은 주위의 농부들한테 헌옷을 얻어서 입었고, 월든 호숫가에 집을 짓고 평생을 도시로 나오지 않고 살았습니다.
소로는 오늘날 생각하면 너무 아름다운 환경에서 살았지요. 그렇지만 산 속에서 고독을 벗하면서 혼자 사는데, 아침 숲을 산책하는 것이 그 사람의 하루 일과 중의 하나라고 「저널」에 씌어 있어요. 「저널」은 그 사람의 시적 일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로는 비록 시인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시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됩니다. 그 월든 호숫가에서 숲속에 살면서 아침마다 한 일이 뭐냐 하면 해 떠오르는 것을 보는 것, 저녁에 하는 일은 해 지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걸 일지에 써놨지요.
특히 일출(日出)은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전율을 얼마나 느끼면서 보는가, 또 '일출에 즈음하여 아침 산책을 나갈 때 새가 지저귈 것이다 하는 기대가 당신을 깨우지 않는다면 당신의 인생에서의 봄, 인생에서의 아침은 이미 지나간 것이다.', '일출과 일몰(日沒)을 보면서 전율하지 않는다면 이미 인생의 아침과 봄은 지나간 것이다.'라는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그의 일지에 따르면 이성과 연애를 한 경험도 없이, 자연과 연애를 하며 살았습니다. 평생을 옷 한 벌로 산 게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다행히도 저희 집에서는 해 뜨는 것과 해 지는 게 잘 보입니다. 새벽 바다를 가르며 해가 떠오르는 걸 볼 때마다, 해가 바다 속에 잠기는 걸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탄성을 올리곤 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시라는 것을 끄적거리고 있나 보다 생각할 때가 참 많습니다. 여러분도 저처럼 자신에게 물어보기 바랍니다. '오늘 몇 번이나 전율했습니까? 그냥 전율한 정도가 아니고, 부르르 떨어본 적은 있는가?' 그걸 자기한테 물어보아, 최소한 일출과 일몰 두 번은 탄성을 질렀던 기억이 우러나와야 합니다. 왜일까요? 문학은 그러한 탄성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다고 할 때 그 속에 탄성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탄성이 없는 글은 죽은 글이라고 보면 거의 정확할 것입니다. 글 속의 어딘가에 분명히 탄성이 숨어 있는데 독자가 그걸 감지할 수 없다면 그 작품은 죽은 작품이거나, 아니면 감상에 젖어 있는 작품일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정확할 것입니다.
죽은 사물이 깨어나는 언어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은 노총각이었습니다. 돌을 주워다가 조각을 하는데, 그 사람의 성격 중의 하나는 여성 혐오증에 걸려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를 아주 싫어했는데, 왜냐하면 이상적인 여자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세계 속에만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던 그는, 어느 날 돌을 주워다가 스스로의 마음 속에 이상형으로 생각해오던 여성을 조각했지요. 자기가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상을 예쁘게 조각해서 앉혀 놓고, 매일 아침에, 잠자리에 들 때 만져주고 뽀뽀하면서 사랑을 했습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에는 제우스신의 축제일이 있었습니다. 이 날에는 누구나 최고의 신인 제우스를 향해 소원을 비는 기도를 하곤 했는데, 피그말리온 역시 소원을 빌었습니다. '제가 만든 조각이 정말로 사람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진짜 여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올렸지요. 그랬는데 그걸 들은 신이 피그말리온의 정성과 진심에 감동하여 정말 그렇게 해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피그말리온은 평소에 하던 대로 자신이 빚은 여인상을 만져주고 뽀뽀도 해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안다 보니까 전에 없이 보들보들한 걸 느끼고 깜짝 놀랐습니다. 피그말리온이 뽀뽀를 하자 돌로 만들어져 딱딱하던 입술은 점점 말랑말랑해지고 빨개져 왔고, 허벅지를 눌러보자 사람의 살처럼 들어갔다 이내 튕겨지듯 나왔습니다. 돌로 빚어진 여인상이 정말 아름다운 여자로 변했던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렇듯 간절한 꿈이 있으면, 여러분의 언어의 살은 퐁퐁 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살아 있는 언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물, 즉 대상에 닿을 것인가 하는 얘기를 할 때, 피그말리온이 빚은 여인상의 살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죽어 있는 사물을 살아 있는 감각을 지닌 생물로 변하게 하는 언어를 쓸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합니다.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피그말리온의 살을 시 속에 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시적 변형을 이야기합니다. 시에서의 어떤 대상은 그것이 곧바로 언어로 되는 게 아니지요. 언어로 변형이 되어 시 속에 들어왔다가, 하나의 언어가 되어서 원고지 위에 앉는 것입니다. 슬로우 비디오로 찍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먼저 우리가 대상을 본다. 대상 가운데의 그 무엇이 시인의 눈 속으로 들어온다. 이것이 시인의 언어로써 변형이 되는 거지요. 바로 그러한 변형을 여러분들이 분리시키는데, 그러한 변형은 피그말리온의 살과 같은 간절성을 가지고 이루어질 때 정말 남을 감동시킬 수 있는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감동하지 않는 언어는 남도 감동시킬 수 없다. 이게 원칙입니다.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도 "이게 과연 시입니까? 내가 신춘문예에 내도 될까요?" 하는 의문을 품고 저를 찾아오는 친구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부분적인 기법을 지적하기보다 먼저 "니가 감동했느냐?" 하고 짧게 질문을 던집니다. 자기가 감동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남이 감동해 주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니가 감동했으면 남도 감동할 것이다."라고 말해주면서 시고를 돌려줍니다.
'감동할 수 있다, 감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피그말리온의 간절함이 여러분 속에 들어왔다가 언어화되어서 나갔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시나 산문들을 보면 간절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 간절성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필연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산문보다 특히 시의 언어는 정말 필연성이 있어야 되는데, 그것은 바로 피그말리온과 같은 간절성, 즉 딱딱한 돌인 대상에다가 말랑말랑한 살을 부여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할 때 획득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필연의 언어를 써라, 진정성의 언어를 쓰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늘 간절함에 차 있으면 사실 전율도 잘 올 수 있고, 탄성도 저절로 터져 나올 수 있고, 언어의 변형도 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속도를 늦추면 더 많은 것이 보인다
무엇을 보았는가? 속도가 느릴수록 잘 보인다. 우리는 같은 사물일지라도 빨리 달리면 그만큼 휙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제대로 보기 어렵습니다. 차를 운전하면서 깨달은 것 가운데 하나는 '시를 쓰려면 차를 타지 말아야겠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속도가 빨라질수록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아프리카의 사막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는 것을 비디오로 본 적이 있습니다. 헬리콥터가 처음에는 높이 날다가 점점 고도를 낮추니까 더 많은 동물들이 헬리콥터의 시각 안에 들어오고, 더 고도를 낮추니까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더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아예 걸어가면서 사진을 찍으니까 그 속에 있는 아주 작은 것들이 막 보이더군요.
그런데 현대시는 어떤 것을 써야 되겠습니까? 큰 것만 써야 되겠습니까? 빨리 달리는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작은 것들에 주목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갈수록 왜소해져 가고 있습니다. 유전공학에서는 멋있는 사람들만 복제의 대상이 되고, 멋없는 사람들은 점점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부모님한테서 태어날 때만 제 의지대로 선택을 하지 못했고, 죽을 때는 자기의 선택대로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죽을 때도 자기의 선택대로 죽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불쌍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작은 것들을 시의 눈으로 읽어야 되는데, 우리는 지금 너무 빨리 달리고만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문학하는 사람들, 종이 위에 무엇인가를 써가며 오늘을 주목하는 사람들이라면 좀 천천히 가면서 작은 것들을 돌아보고 작은 것들을 노래로 담아야 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모름지기 시인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문단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허무집」을 상재한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허무 수첩」이라는 에세이집도 내고 했는데, 아직도 허무를 붙잡고 앉아 있느냐는 식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로서는 일생을 두고도 모자라는 테마가 허무인 것 같습니다. 허무는 또 하나의 생명이지요. 바로 무수한 작은 것들의 생명길, 그것이 허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종이 위에 그 무엇인가를 뱉어내는 사람들이라면 그 허무를 쓰다듬지 않으면 무얼 쓰다듬겠습니까?
내 곁의 한 사람의 울음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 집에서 화분들을 몇 개 키우고 있는데, 저는 오늘도 화분들한테 인사를 해주고 왔습니다. '내일 갈 테니 잘 있거라'고 인사를 건네고 왔는데, 작은 것들이 너무 예쁘고 너무 생명스럽습니다. 제가 동백나무보다 조금 크다고 해서 더 가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저의 생명도 하나고 동백나무의 생명도 하나입니다. 요즘 우리 집에 아주 큰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현관에 화분이 하나 있는데, 집에서 잠깐 기르던 강아지가 화분 속의 나무를 마구 갉아먹은 거예요. 사람 같으면 금방 붕대를 감고 치료를 했을 텐데, 나무이기 때문에 그대로 내버려두었지요.
그런데 그 나무가 3년 동안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처를 그대로 놔두었기 때문에, 훼손된 수관으로 곳으로 물을 빨아올리지를 못하는 거예요. 아침마다 잎이 하나씩 누렇게 되는데, 만약에 그것이 사람이라면 소리를 지르지 않겠습니까.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겠지요. 그러면은 도와주었을 텐데 말을 못하는 바람에 내가 몰랐지요.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나무를 매일 아침 바라보고 있습니다.
응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옆을 지나갈 때 혹시 어떤 생각들을 하십니까? 길을 비켜 주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시겠지요. 저 자신 예전에는 차를 비켜주면서 어떤 그림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응급차 안에서 누가 막 죽어가고 있거나 고통을 참고 있는 그림이 눈앞에 떠오르더라구요. 나중에 저 자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시를 쓰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릴케의 글에도 그런 게 나오지요. '한 사람이 울고 있다.'로 시작하는 「두이노의 비가(悲歌)」가 그것이지요. 저는 젊은 시절 「허무집」을 쓸 때에는 맨날 우는 얘기를 썼는데, 정말 울고 있는 것을 요새같이 더 직감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응급차가 지나가도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아침마다 잎을 뜯어줄 때 그 화분에서도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바로 그런 어떤 작은 것들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써야 되지 않을까요. 그러려면 우리의 '보는 법'이 조금은 달라져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글을 쓰려고 한다면 좀더 자세히 봐야 됩니다. 현대는 앞으로 속도가 점점 빨라질텐데, 그런 사회 속일수록 '잘 보는 법'이 정말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눈을 지닌 사람들이 정신없이 굴러가는 세상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 앞으로의 세계에서는 적어도 각 나라가 변별성을 가지는 것은 문학이 아닐 것입니다. 빨리 가는 사람들은 지나치고 마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 문학을 키워가는 것이고, 결국은 이 세계를 살아 남게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지금 증권들 해서 굉장히 잘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돈으로써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결국 얼마나 우리가 잘 사는 모양들을 보았는가, 그것을 언어화할 수 있는가 하는 것 때문에, 우리의 삶이 삶다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스스로를 선택할 세상이 올 때 인간의 존엄을 지키면서 살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거창한 생각까지 할 때가 많습니다. '보는 법'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요즘 굉장히 시끄러운 세상, 속도가 빠른 세상에 살고 있음과 동시에 침묵이 굉장히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문학 중에서도 시는 침묵이 탄생시킨 바가 참 많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루에 얼마나 침묵했습니까. 고독을 굉장히 무서워하는데 사실 문학은 고독이 없으면 나오지 않습니다. 고독이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하나의 장애일 수 있습니다. 실은 일종의 정신적인 장애로서 남다른 고독을 맛볼 때 사실은 문학은 탄생된다고 생각합니다. 속도와 떨어져서 자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문학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데서 나온 문학은 참다운 생명력을 지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중심이 해체되는 그런 포스트모던한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중심이 해체되면서 문학 동아리들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전부 위기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심이 해체됨으로 해서 사실은 중심이 많아지기도 하는 것이니까요. 그 전에는 중심이 하나였지만 지금은 그것이 열 개로 해체된다면, 중심이 열 개가 생기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더 희망적일 수 있다고 봅니다. 바쁘고 빨리 돌아가는 시대에 문학은 제대로 보는 눈을 가질 수 있다면 앞으로 갈수록 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위에 말씀드린 몇 가지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지면서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입니다.출처 : 열 린 바 다글쓴이 : 양현주 원글보기메모 :'현대시 > 시창작 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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