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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 / 문정희(1947-)현대시/한국시 2011. 1. 23. 17:53
유방 / 문정희(1947-)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끌어안는다
찌그러지는 유두 속으로
공포가 독한 에테르 냄새로 파고든다
패잔병처럼 두 팔을 들고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유방암 사진을 찍는다
사춘기 때부터 레이스 헝겁 속에
꼭꼭 싸매 놓은 유방
누구에게나 있지만 항상
여자의 것만 문제가 되어
마치 수치스러운 과일이 달린 듯
깊이 숨겨놨던 유방
우리의 어머니가 이를 통해
지혜와 사랑을 넣어주셨듯이
세상의 아이들을 키운 비옥한 대자연의 구릉
다행히 내게도 두 개나 있어 좋았지만
오랜 동안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것이었고
또 아기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나 지금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안고 서서
이 유방이 나의 것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축 늘어진 슬픈 유방을 촬영하며
**소감 몇 마디**
어디선가 제목이 야(?)하고 직설적(?)이라 눈길이 가 읽어보니,
어느 날의 검진이 이 시의 모티프가 된 것 같고,
이 와중에 작자는 자신의 몸의 일부분이 본래 자신의 것이었지만
오랫동안 자신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는 내용인데,
넓게 해석을 하자면,
여성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과거에 잃어버린 자아의 일부를 회복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첫째, 내용자체는 흔히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 새로울 것이 없지만,
이런 평범한 일상 속에서 건져낸 위와 같은 통찰의 시는 처음 읽었을 때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살아가면서 내 것임에도 내 것이라 못 느끼고 살아가는 것이 나도 많이 있을 수 있구나.
둘째, 시란 사랑이나 외로움처럼 각종 감정을 토로한 것도 있지만,
이처럼 삶의 한 순간에 대한 통찰을 이성적으로 그려낸 것도 있으며,
이 통찰이 때로는 시를 읽는 맛을 주기도 한다.
맛이 없으면 막걸리를 못 마시듯이, 시도 맛이 없으면 못 읽는다.
솔직히 감정을 여과와 절제 없이 마구 쏟아낸 많은 시들은 깊이가 없어 질리고 그윽한 맛이 없어 읽는 맛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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