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건강 검진 / 김명원(1959-)현대시/한국시 2013. 12. 8. 16:11
시 건강 검진 / 김명원(1959-)
시를 욕심껏 입양해서 키워 본 사람들은 안다
어디에서 문득 시를 발견해낼지 몰라 전전긍등
소심하게 더듬이를 무수히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안다
길을 가다가 꽃을 머리에 꽂고 모든 남자들에게
사랑해, 연발하는 여인을 보면 수첩을 펴놓고
열심 스케치를 하였던 시장의 오후,
쓸쓸한 장례식의 뒤에 묻어가면서도
엄청난 죽음의 무게를 시로 생각했던 장지의 숲,
지하철 역사에서 만난 노숙자에게도
눈을 번뜩이며 시상을 구했던 밤의 적막,
나는 한 떄 온통 시어를 구하기에 미쳐있었고
행복했고
내가 간택한 시어들은 한 번도 나를
배반한 적이 없었고
더욱 행복했고,
그들에게 이미지의 옷을 재단해 입혀주며
메시지가 소스로 양념 된 밥을 먹여주며
옹알이를 하던 내 시가 나날이 성장하고
몸무게를 늘릴 때마다 행복은 극치로 치달았고,
배부른 소크라테스의 웃음을 웃으며 나는
이미 충분히 행복했으므로 행복을 잊었다
어느 날, 시정부詩政府로부터
내 시들에게 건강검진을 받게 하라는 통보가 도착했다.
오래 산 그들의 건강이 염려스러웠으므로
나는 시인들이 줄지어 서 있는 보건소 접수대에서
비로소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도 너무 살이 쪄버린 내 시들은
추할 정도로 비만이거나, 배만 유달리 볼록 튀어나왔거나
두터운 이미지의 화장에 짓눌리거나 지나치게 성형 수술에 길들여져
애당초 어떤 얼굴이었던 지 자신들조차 몰랐던 것이다.
맨 살의 정갈한 뺨,
투명한 실핏줄이 드러나는 피부,
홑 겹 광목 천에 감싸인 부드러운 어깨선,
치장 한 적 없기에 스스로가 확실한
다른 시인들의 시들은 도도하고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내 시들도 이미 눈치 챘는지
칭얼대기 시작했다, 다리가 아프다고,
두통이 심하다고, 화장실에 가야겠다고,
나는 그들을 줄줄이 업고 다니며 달래야만 했다.
건강검진 결과는 자명한 일,
한 시는 중등도 비만이므로 긴급 다이어트 처방을,
다른 시는 지방간으로 긴 휴식을,
관절염이 심해 스스로 걷지 못하는 시는 재활의료과에 입원을,
더구나 끔찍했던 것은
짧은 시들에게 안락사를 권고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뒤늦게 파양을 결심했지만, 그리하여
그들을 지혜로이 돌보아 줄 현명한 시인들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지나친 성형수술로 주름진 이마며
화려한 화장이 얼룩진 사이로 드러나는 기미며
씻긴 적 없기에 방치된 목에 낀 때를 보는 순간,
누구도 받아줄 것 같지 않은 예감에
연민으로 목이 메었다
온갖 생을 나에게 작부로서 바쳐온 퇴기들을 보듯
그들에게 나는 보건소장의 처방대로 해주기로 했다
그것만이 내가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정분이려니
내 시들이 사육된 축사 문을 열자
어? 무엇인가, 축축하고 어두운 물들이
내 눈에서 떨어진다.
-『현대시』2005년 10월호에서'현대시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류가 본 삼류들 / 정겸 (0) 2013.12.08 삼류들 / 이재무 (0) 2013.12.08 國家 詩人 考試 / 김명원(1959-) (0) 2013.12.08 죄를 고해하다 / 김명원(1959-) (0) 2013.12.08 천천히 먹어, 라는 말은 / 이인원 시인 (0) 2013.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