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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의 길 / 유안진 (1941-)현대시/한국시 2009. 4. 26. 14:02
까마귀의 길 / 유안진 (1941- )
어두워야 보인다지
눈을 감고 기도하는 까닭이라지
토굴 속에 들어가서 도(道) 닦는 까닭이라지
하늘의 달도 밤길을 더 잘 가는 까닭이라지
선견자 중에 맹인이 많은 까닭이라지
영험할 수록 판수(判數)가 많은 까닭이라지
불을 끄고 눈마저 감아야
대낮에 잃은 길도 찾아낼 수 있다지
기나긴 깜깜 어둠 깊고 깊은 깜깜 밑바닥에서
나만이 나의 길인 것을
나만이 나의 미래인 것을
어둠만이 촛불을 꽃 피울 수 있다는 것을
찾은 길을 잃지 않으려면
여름도 겨울보다 춥게 살아야 한다지
눈발이 그쳤다
밤중도 늙으면 새벽이 되지만
만년을 늙어도 터럭 한 올 흴 수 없다
섣달 그믐밤 얼어붙은 가지 끝을 체온으로 녹이는 도래까마귀
울음 한 번 떨치면 반경 600리 밖에까지 몸서리치는 고독의
선사이래 백설보다 순결한 검은 세계를 살며
영민과 고독과 숭고함의 길을 가는 사제로서 전령사로서
밤과 겨울의 검은 치마 시인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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