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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암늑대라면 / 양애경 (1956-)
    현대시/한국시 2009. 5. 6. 11:10

    내가 암늑대라면 / 양애경 (1956-)


    내가 암늑대라면

    밤 산벚나무 밑에서 네게 안길 거다

    부드러운 옆구리를 벚꽃나무 둥치에 문지르면서

    피 나지 않을 만큼 한 잎 가득 네 볼을 물어 떼면

    너는


    만약 네가 숫늑대라면

    너는 알코올과 니코틴에 흐려지지 않은

    맑은 씨앗을

    내 안 깊숙이 터뜨릴 것이다 그러면 나는


    해처럼 뜨거운 네 씨를

    달처럼 차가운 네 씨를

    날카롭게 몸 안에 껴안을 거다


    우리가 흔들어 놓은 벚꽃 둥치에서

    서늘한 꽃잎들이 후드득 떨어져

    달아오른 뺨을 식혀 줄 거다


    내 안에서 그 씨들이 터져

    자라고 엉기고 꽃 피면

    (꽃들은 식물의 섹스지)

    나는 언덕 위에서

    햇볕을 쐬며 풀꽃들 속에 뒹굴 거다


    그러다 사냥을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무거워진 내 곁을

    네가 떠나 버린다면

    그래서 동굴 안에서 혼자 새끼를 낳게 한다면

    나는 낳자마자 우리의 새끼를 모두 삼켜 버릴 거다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겠지

    움직이지 못하게 된 내 곁을 지키면서

    눈시울을 가느다랗게 하면서

    내 뺨을 핥을 거다


    후에 네가

    수컷의 모험심을 만족시키려 떠난다면

    나는 물끄러미

    네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거다

    그리고 다음 해 봄에는

    다른 수컷의 뺨을 깨물 거다

    평생을 같은 수컷의 씨를 품는 암늑대란

    없을 거니까


    내 꿈은 무리에서

    가장 나이 들고 현명한 암컷이 되는 것

    뜨거운 눈으로 무리를 지키면서

    새끼들의 가냘픈 다리가 굵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일

    그리하여 나는 거기까지 가는 거다

    이 밤 이 산벚꽃나무 밑둥에서 출발하여

    해 지는 언덕 밑에 자기 무리를 거느린

    나이 든 암컷이 되기까지.


    * 내가 암늑대라면 / 고요아침, 200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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