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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시) 젖은 옷은 마르고 / 김용택 시인현대시/한국시 2016. 5. 27. 18:57
젖은 옷은 마르고 / 김용택 시인
하루 종일 너를 생각하지 않고도 해가 졌다
너를 까맣게 잊고도 꽃은 피고
이렇게 날이 저물었구나.
사람들이 매화꽃 아래를 지난다.
사람들이 매화꽃 아래를 지나다가
꽃을 올려다본다. 무심한 몸에 핀 흰 꽃,
사람들이 꽃을 두고 먼저 간다.
꽃이 피는데, 하루가 저무는 일이 생각보다 쉽다.
네가 잊혀진다는 게 하도 이상하여
내 기억 속에 네가 희미해진다는 게 이렇게 신기하여,
노을 아래서 꽃가지를 잡고 놀란다.
꽃을 한번 보고 내 손을 들어 본다.
젖은 옷은 마르고 꽃은 피는데
아무 감동 없이 남이 된 강물을 내려다본다.
수양버들 나뭇가지들은 강물의 한 치 위에 머문다.
수양버들 가지가 강물을 만나지 않고도 푸른 이유를 알았다.
살 떨리는 이별의 순간이
희미하구나. 내가 밉다. 네가 다 빠져나간
내 마른 손이 밉다. 무덤덤한 내 손을 들여다보다가
네가 머문 자리를 만져본다
잔물결도 일지 않는구나. 젖은 옷은 마르고
미련이 없을 때
너를 완전히 잊을 때
꽃이 무심하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사랑은
한낱 죽은 공간, 네 품속을 완전히 벗어날 때 나는 자유다.
네 모습이 지진 없이 그대로 보인다.
실은, 얼마나 가난한가. 젖었다가 마른 짚 검불처럼 날릴
네 모습은 얼마나 초라한가. 꽃이 때로 너를 본다는 걸 아느냐.
보아라! 나를
너를 까맣게 잊고도 이렇게 하루가 직접적인 현실이 되었다.
젖은 옷은 마르고, 나는 좋다.
너 섰던 자리에 꼭 살구나무가 아니어도 무슨 상관이냐.
이 의미가, 이 현실이 한밤의 강을 건너온 자의 뒷모습이다.
현실은, 바로 본다는 뜻 아니냐. 고통의 통과가 자유 위의 무심이다.
젖은 옷은 마르고, 이별이 이리 의미 없이 묵을 줄 몰랐다.
꿈속으로 건너가서 직시한 저 건너
현실, 바로 지금 이 순간 꽃은 피고
젖은 옷은 마른다.
<실천문학 107: 2012/가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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