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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행길 / 김규동 (1925-)현대시/한국시 2009. 5. 27. 10:26
초행길 / 김규동 (1925-)
-<하나의 세상> 자유문학사-
그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옥순이 조그만 보따리에
날씬 침입자의 손이 스쳐간 것은
쑥 들어온 손을 본 이는 아무도 없으나
기차는 서울에 무사히 닿았고
옥순이는 여비를 몽땅 털렸다
교과서에서 배운 서울은 아름다운 곳이었으나
옥순의 초행길을 망친 것은
어디서 온 지도 모를 검은 손이었다
옷가지 사이에서 없어진
지갑을 아무리 뒤져도
잡히는 것은 허전한 가슴뿐
바쁘게 출구 계단을 오르는
사람물결에 밀리며
다시 돌아 보았을 때
가슴 두근거리게 하던 기차는
잠자코 거기 서있고
옥순이 물음에 답해 주는 것은
여기저기에 누웠거나 치솟은
거대한집들의 높음과 넓음뿐이었다
당황한 옥순이 눈앞에
어린 동생들 가물거리는 눈동자가 지나갔고
허리굽은 할머니 하얀 모습이 얼비쳤다
지난 여름 홍수 때
하늘에 닿을 듯이 부풀어 오르던
낙동강의 무서운 얼굴이 불현듯 스쳤다
매일 매일
도살장에서 순식간에 죽는 소들처럼
할딱거리는 옥순이 가슴도 그렇게 무너져갔다
한 사람을 죽이는 f이
하나의 티없이 맑은 심성을
파괴하는 일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던 젊은이가
마주오는 트럭을 들이받아
펑 소리와 함께 인도에 나가 덜어져 숨지던
그 아찔한 교통사고를 떠올려 본다
매사 처절하고 허망한 일은
순식간에 이뤄진다는 것을
지우고 잊어버리지 않아도
해는 다시 뜨고
나날의 바퀴는 굴러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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