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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기의 십자가 / 형문창 (1947-)현대시/한국시 2009. 4. 9. 16:14
영기의 십자가 / 형문창 (1947-)
<詩와 십자가>에서
내일은 주일입니다. 영기는 날이 어서 밝기를 기다리며 골목길에 나와 교회 쪽을 바라봅니다. 어린이 교리를 들으면 주는 빵 한 개를 일주일 내내 기다린 영기입니다. 언비를 못 내서 쫓겨난 유아원이 있는 교회지만 주일날은 원비와 상관없이 빵을 줍니다. 그런데 큰일입니다. 교회가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저기 휘황찬란한 십자가가 저리 많은데 세상은 아직 어둠에 묻혀 있고 정작 어느 십자가가 우리 주일학교(빵을 주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됩니다. 갑자기, 내일은 혹시 빵을 못 얻어 먹게 되지나 않을까 덜컥 걱정이 생깁니다. 한편으로는 욕심도 생깁니다. 저 반짝이는 십자가의 모든 교회들이 각각 주일이 달라서, 매일 돌아가면서 빵을 먹을 수만 있다면 얼마 좋을까. 그러나 영기는 금방 뉘우칩니다. 욕심은 재앙을 부른다는 예수님 말씀 때문입니다. 영기는 방으로 들어와 눈을 감고 누웠습니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돌아오지 않는 엄마가 어른거리고 소주병을 끼고 사는 아빠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것도 같고 주인집 아주머니가 방 빼! 하고 들이닥칠 것도 같아 머리가 너무 복잡합니다. 가난이 웬수지,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누. 삶은 감자 한 알을 주시던 옆집 할머니도 떠오릅니다. 할머니 말씀은 그런대로 이해가 되는데 예수님 말씀은 정말 헷갈려. 그깟 가난이 뭐가 좋다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을까. 영기는 투덜대다가 새벽녘에야 까무룩 잠이 든 모양인데 꿈속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영기야, 이제 내가 너를 거두리라. 그러니 너는 입을 것 먹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 그러나 명심해라. 반짝이는 것이 다 보석은 아니니라. 껍데기만 요한한 것을 항상 경계하라. 오히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 내 눈에는 더 잘 뜨이나니 너는 걱정하지 말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영기는 머릿속으로 뿌연 안개가 몰려오는 것 같았지만 예수님이 주신 나무십자가가 너무 못생기고 초라해서 배시시 웃으며 어깨에 짊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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