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시) 봄날에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를 들으며 - 황동규

밝은하늘孤舟獨釣 2022. 7. 9. 08:57

라디오에서 이 시를 접하고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프로그램 진행자는 황동규 시인이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가가 되고 싶은 꿈도 지닌 적이 있었다는 말도 했다. 아무튼 긴 제목의 흥미로운 시이다.

 

봄날에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를 들으며 - 황동규

 

 

문주란 소철 귤 화분 속 여기저기 내려앉아 피어 있는 민들레들,

턱이 낮은 네모난 괭이밥 분 가장자리에

아슬아슬 붙어 핀 놈도 있네.

이놈들이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지,

초봄 내 망사 창을 닫아두었는데.

모르는 게 어디 한두 가진가.

어느 날은 마음에 가까운 것 멀리하고

먼 것 가깝게 해보려고

몇 번 읽다 던진 책 열심히 읽었다, 전화 한 통 없이.

 

세상 모든 일 다 그렇다고 하지만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천천히

그 누구보다도 천천히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번 마지막 악장을 치듯

치는 도중 찻물 끓어 그만 의자에서 일어섰나,

곡이 끝나듯

그렇게 살고 싶다.

 

오늘 같은 봄날 오후

미시령에 차 세우고 문을 열자

고요,

아 이렇게 미치게 바람 자는 미시령도!

저 하늘, 저 고요 속, 춤추는 호랑나비,

저 형상, 저 무한 곡선!

 

피렌체 남쪽 백여 리 시에나 시() 언덕

두오모 성당에 빨려들어간 오후 두시

정문 위 스테인드 글라스가 햇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성상(聖象) 모자익들 일순 승화하고

창 전체 세상 전체가 온통 부신 빛.

 

눈감으면

눈의 안마당에 들어와 춤추는 저 무한 형상령(形象靈),

저 춤의 무량(無量)!

 

의자에서 일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