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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는 순간을 기다린다 – 허만하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2. 1. 15:00
어제 방송된 <주현미의 러브레터>의 "느낀 한 스푼"에서 소개된 詩이다.
오리는 순간을 기다린다 – 허만하 시인
청둥오리는 연푸른 수면 위에 목안처럼 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수면 밑에서 쉴 새 없이 물을 젓고 있다. 쌀쌀한 바람에 묻어있는 연두색 미나리 냄새를 가려내는 내 시린 코끝처럼, 귤빛 오리발은 시시각각 변하는 물의 온도를 재고 있다.
시베리아 고원 자작나무숲을 건너는 눈바람 소리를 찾아, 미지의 길을 날개 칠 순간을 기다리는 오리의 몸은 언제나 반쯤 수면 밑에 잠겨 있다. 한 번의 폭발을 위하여 화약가루가 머금고 있는 적막한 기다림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오리.
삭막한 겨울 풍경에 대한 그리움을 접은 날개 밑에 품은 채 오리들은 비취색 물빛 위를 고요히 흐르고 있다. 바람은 언제나 미래 쪽에서 불어온다. 기다림에 서린 긴장을 견디지 못한 야생의 매화가 첫 꽃망울을 터뜨리는 순간, 오리들은 일제히 물을 차는 자욱한 깃 소리가 되어 눈부신 하늘에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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