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리 짜는 늙은이와 술 한잔을 나누고 - 신경림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2. 4. 09:02
자리 짜는 늙은이와 술 한잔을 나누고 - 신경림 시인
자리를 짜보니 알겠더란다
세상에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미끈한 상질 부들로 앞을 대고
좀 처지는 중질로는 뒤를 받친 다음
짧고 못난 놈들로는 속을 넣으면 되더란다
잘나고 미끈한 부들만 가지고는
모양 반듯하고 쓰기 편한 자리가 안 되더란다
자리 짜는 늙은이와 술 한잔을 나누고
돌아오면서 생각하니 서러워진다
세상에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기껏 듣고 나서도 그 이치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내 미련함이 답답해진다
세상에 더 많은 것들을 휴지처럼 구겨서
길바닥에 팽개치고 싶은
내 옹졸함이 미워진다
- 랜덤하우스에서 2007년 나온 신경림 시화선집 <이래서 이 세성에 꽃으로 피었으면> 중에서 -
'현대시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 1 - 신경림 시인 (2) 2023.12.04 물로 빚어진 사람 - 김선우 시인 (4) 2023.12.04 연가(戀歌) - 이근배 시인 (0) 2023.12.01 오리는 순간을 기다린다 – 허만하 시인 (2) 2023.12.01 종례 시간 – 도종환 시인 (2) 2023.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