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시)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 김수영(1921-1968)

밝은하늘孤舟獨釣 2024. 5. 9. 13:51

김수영 시인에 관한 책을 보다가 아래 시가 소개되어 전문을 검색하였다. 다음과 같다. 상당히 긴 편이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 김수영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이제야말로 아무 두려움 없이
그놈의 사진을 태워도 좋다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인
지긋지긋한 그놈의 미소하는 사진을 -----
대한민국의 방방곡곡에 안 붙은 곳이 없는
그놈의 점잖은 얼굴의 사진을
동회란 동회에서 시청이란 시청에서
회사란 회사에서
××
단체에서 ○○협회에서
하물며는 술집에서 음식점에서 양화점에서
무역상에서 가솔린 스탠드에서
책방에서 학교에서 전국의 국민학교란 국민학교에서 유치원에서
선량한 백성들이 하늘같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던 그 사진은
사실은 억압과 폭정의 방패이었느니
썩은놈의 사진이었느니
아아 살인자의 사진이었느니

너도 나도 누나도 언니도 어머니도
철수도 용식이도 미스터 강도 유중사도
강중령도 그놈의 속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무서워서 편리해서 살기 위해서
빨갱이라고 할까보아 무서워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편리해서
가련한 목숨을 이어가지 위해서
신주처럼 모셔놓던 의젓한 얼굴의
그놈의 속을 창자밑까지도 다 알고는 있었으나
타성같이 습관같이
그저그저 쉬쉬하면서
할말도 다 못하고
기진맥진해서
그저그저 걸어만 두었던
흉악한 그놈의 사진을
오늘은 서슴지않고 떼어놓아야 할 날이다

밑씻개로 하자
이번에는 우리가 의젓하게 그놈의 사진을 밑씻개로 하자허허 웃으면서 밑씻개로 하자
껄껄 웃으면서 구공탄을 피우는 불쏘시개라도 하자강아지장에 깐 짚이 젖었거든
그놈의 사진을 깔아주기로 하자 .......

민주주의는 인제 상식으로 되었다
자유는 이제 상식으로 되었다
아무도 나무랄 사람은 없다
아무도 붙들어갈 사람은 없다

군대란 군대에서 장학사의 집에서
관공리의 집에서 경찰의 집에서
민주주의를 찾은 나라의 군대의 위병실에서 사단장실에서 정훈감실에서
민주주의를 찾은 나라의 교육가들의 사무실에서
4.19
후의 경찰서에서 파출소에서
민중의 벗인 파출소에서
협잡을 하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는
관공리의 집에서
역이란 역에서
아아 그놈의 사진을 떼어 없애야 한다

우선 가까운 곳에서부터
차례차례로
다소곳이
조용하게
미소를 띄우면서

영숙아 기환아 천석아 준이야 만용아
프레지덴트 김 미스 리
장순이 박군 정식이
그놈의 사진일랑 소리없이 떼어 치우고

우선 가까운 곳에서부터
차례차례로
다솟곳이
조용하게
미소를 띄우면서
극악무도한 소름이 더덕더덕 끼치는

그놈의 사진일랑 소리없이
떼어 치우고 ----

<1960. 4. 26
이른 아침>

 

"위와 같이 시작한느 혁명 시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는 어제와의 결별을 바라는 시인의 마음을, 아니 모든 국민의 마음을 '독재자, 살인자 이승만의 얼굴을 밑씻개로 하자'라는 국민 누구나 바로 실천할 수 있는 직접적 행동 구호로 집약해 내고 있다. 썩어 빠진 어제와으ㅟ 결별은 멀리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싲가해야 하며, 혁명은 정치인과 학생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바로 지금 해야 함을 웅변하고 있다." <길 위의 김수영>310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