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시) 가다오 나가다오 - 김수영 시인

밝은하늘孤舟獨釣 2024. 5. 9. 14:11

아래의 시는 1960년에 김수영 시인이 외세가 한반도에서 떠나기를 바라며 쓴 시이다.

 

 

가다오 나가다오 - 김수영 시인

 

이유는 없다---
나가다오 너희들 다 나가다오
너희들 미국인 소련인은 하루바삐 나가다오
말갛게 행주질한 비어홀의 카운터에
돈을 거둬들인 카운터 위에
적막이 오듯이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는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는
석양에 비쳐 눈부신 카운터 같기도 한 것이니

이유는 없다---
가다오 너희들의 고장으로 소박하게 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가다오
미국인과 소련인은나가다오가다오의 차이가 있을 뿐
말갛게 개인 글 모르는 백성들의 마음에는
미국인소련인도 똑같은 놈들

가다오 가다오
‘4
월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끝나고 또 시작되고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잿님이 할아버지가 상추씨, 아욱씨, 근대씨를 뿌린 다음에
호박씨, 배추씨, 무씨를 또 뿌리고
호박씨, 배추씨를 뿌린 다음에
시금치씨, 파씨를 또 뿌리는
석양에 비쳐 눈부신
일년 열두 달 쉬는 법이 없는
걸찍한 강변밭 같기도 할 것이니

지금 참외와 수박을
지나치게 풍년이 들어
오이, 호박의 손자며느리 값도 안 되게
헐값으로 넘겨버려 울화가 치받쳐서
고요해진 명수 할버이의
잿물거리는 눈이
비둘기 울음소리를 듣고 있을 동안에
나쁜 말은 안하니
가다오 가다오

지금 명수할아버이가 멍석 위에 넘어져 자고 있는 동안에
가다오 가다오
명수 할버이
잿님이 할아버지
경복이 할아버지
두붓집 할아버지는
너희들이 피지 섬을 침략했을 당시에는
그의 아버지들은 아직 젖도 떨어지기 전이었다니까
명수 할버이가 불쌍하지 않으냐
잿님이 할아버지가 불쌍하지 않으냐
두붓집 할아버지가 불쌍하지 않으냐
가다오 가다오

선잠이 들어서
그가 모르는 동안에
조용히 가다오 나가다오
서푼어치 값도 안되는 미·소인은
초콜렛, 커피, 페치코트, 군복, 수류탄
따발총을 가지고
적막이 오듯이
적막이 오듯이
소리없이 가다오 나가다오
다녀오는 사람처럼 아주 가다오!

-
김수영, ‘가다오 나가다오’(1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