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보문동 – 권대웅 시인현대시/한국시 2024. 7. 20. 22:12
아래의 시는 오늘 밤 라디오 방송 《청하의 볼륨을 높여라》에서 소개되었던 시이다.
보문동 – 권대웅 시인
미음자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쌀을 씻는 어머니
어깨 위로 뿌려지는 찬물처럼
가을이 왔다
반쯤 열린 나무 대문을 밀고
삐그덕 들어오는 바람
마당에 핀 백일홍 줄기를 흔들며
목 쉰 소리를 낸다
곧 백일홍이 지겠구나
부엌으로 들어가는 어머니 뒷모습이 아득하다
툇마루에 놓여 있던 세발자전거
햇빛이 너무 좋아서
그 곁에서 깜빡 졸고 일어났을 뿐인데
백발이 되었다
기와지붕 너울 너머로 날아가는 나뭇잎들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구름들
꽃잎에 섞인 빗방울의 날들
어둑해지는 처마 밑으로 우수수 떨어진다
지금 여기가 어디지?
몇 세기를 살고 있는 것이지?
돌아보면 어둑어둑 텅 빈 마당
어머니가 꼭 잠가 놓고 가지 않은 수돗물 소리
똑똑똑
세월 저편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처럼
수백 년이 지난 골목길을 빠져나간다
시집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문학동네 2017년
'현대시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 여름밤이 길어요 - 한용운 스님 시인 (0) 2024.07.29 (시) 바느질하는 손 – 황금찬 시인 (0) 2024.07.29 (시) 늙어가는 길 - 윤석구 시인 (0) 2024.07.19 (시) 비꽃 - 김신용 시인 (0) 2024.07.19 (시) 자두 – 이상국 시인 (0) 2024.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