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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연재 4회] 당신의 무뎌진 손끝 外
    현대시/시창작 관련 2009. 7. 4. 16:31

                        임 보 시인의 알기 쉬운 시 창작교실



                                당신도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연재 4회]

                                                         

                                                               임 보 (시인 • 전 충북대 교수)


     

    [제9신]

      당신의 무뎌진 손끝


      로메다 님,

      어느 분야이든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지 않고서는 어렵습니다.

      피아니스트가 하나의 곡을 익히기 위해서는 수십만 번의 건반을 두드려야 합니다.

      학자들이 한 편의 논문을 쓰기 위해 수많은 밤들을 지새우기도 합니다.

      소설을 공부하는 문학도들도 얼마나 고된 수련을 감행하는지 아십니까?

      어휘력을 풍부히 쌓기 위해 거대한 사전을 몇 번씩 독파하기도 하고, 문장력을 기르기 위해 세계적인 명작 소설들을 수십 번씩 옮겨 쓰기도 합니다.


      오늘은 한국의 한 저명한 소설가가 소설 공부를 할 때의 일화를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그는 <돌>이라는 하나의 소재를 설정하고 내용이 같지 않은 100가지의 산문 쓰기에 도전했다고 합니다.

      ‘돌’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니까, 한 20가지쯤 쓸 때까지만 해도 별 어려움을 못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뒤부터서는 점점 쓸거리가 고갈되어 여간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상상력의 도움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상상력이란 '만들어 낸 생각' 아닙니까?

      상상력을 동원하여 없는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는 드디어 <돌>에 대한 100가지 산문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고 났더니 놀랍게도 큰 변화가 왔다고 합니다.

      그의 앞에 어떠한 소재가 주어져도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무슨 소재를 가지고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엮어낼 수 있는 상상력의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마치 데생의 실력을 갖춘 화가에겐 어떠한 대상이 주어져도 두렵지 않은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메다 님,

      지금부터 우리도 그러한 훈련에 돌입하기로 합니다.

      하나의 사물을 설정하고 100개의 이미지를 추출해 봅시다.

      우리도 <돌>을 놓고 연습을 해볼까요?

      처음엔 유추적 이미지를, 다음엔 연상적 이미지를 찾아내 봅시다.

      몇 개쯤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몇 십 개쯤은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점점 새로운 이미지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머리를 더 짜보세요. 골똘히 생각해 보세요.

      그래도 생각이 잘 안 나면 유추와 연상의 고리에 얽매이지 말고 자연스럽게 생각의 폭을 넓혀 보세요.

      김종삼이 ‘북 치는 소년’ 속에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생각해 내듯이 아주 낯선 생소한 것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당신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그런 것으로 말입니다.

      무언가 그럴 듯한 이미지가 떠오르면, 네, 그것을 붙잡으세요.

      그것이 바로 저번에 우리가 골치 아프다고 잠시 유보해 두었던 창조적 이미지입니다.

      그런 창조적 이미지를 계속 찾아내어 100개를 채우세요.


      로메다 님,

      당신이 만일 하나의 사물을 놓고 100가지 이미지를 찾아내는 훈련을 몇 번만 되풀이한다면 어떠한 사물이 당신 앞에 주어진다 하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아름답고 독창적인 이미지를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다상량多商量의 힘이고 격물格物의 이치입니다.


      명 요리사란 주어진 재료가 별것 아니더라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냅니다.

      명 목수는 어떠한 목재가 주어져도 그 목재에 맞는 좋은 가구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시인은 어떠한 소재가 주어져도 감동적인 시를 만들어 냅니다.

      시인도 일종의 기능인입니다. 언어를 잘 다루는 기술자입니다.

      무슨 분야이든 기능인이 되기 위해선 피나는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수많은 상처들로 얼룩진 명장名匠들의 손을 보십시오.

      마치 명장名將들의 가슴에 매달린 훈장처럼 반짝이지 않습니까?


      로메다 님,

      당신의 손가락 끝 고운 지문들이 다 무디어지도록 자판기의 활자들을 두드리십시오.

      당신의 부드러운 중지中指의 목이 단단한 볼펜에 눌려 굳은살이 박이기를 기대합니다.

      물론 고운 손끝으로도 시를 빚어낼 수 없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이 기억해 주는 ‘좋은 시’는 굳은살이 박인 무딘 손끝에서 태어나기 마련입니다.

      시는 아무나 쓸 수 있지만 좋은 시는 아무나 쓸 수 없습니다.

      로메다 님,

      당신이 좋은 시를 쓸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제10신]

      관념의 사물화


      로메다 님,

      이미지 찾는 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지요?

      두드리는 자에게 문이 열린다고 하지 않던가요?

      이미지도 열심히 찾는 이에게 머리를 내밉니다.


      나는 전에 소재를 양분하여 우리의 몸 밖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객체적 소재’,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정황들을 ‘주체적 소재’로 구분한 바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이미지를 찾았던 것은 객체적 소재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다른 한 편인 주체적 소재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외부의 세상 못지않게 복잡다단합니다.

      얼마나 많은 욕망과 감정이 뒤얽혀 있습니까?

      희의 소위 7정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부침하면서 우리의 감정을 지배합니다.

      이러한 감정과 욕망들이 또한 시의 중요한 소재입니다.

      아니, 어쩌면 객체적 소재들 못지않게 이러한 주체적 소재들― 곧 감정 때문에 시를 쓰게 된 경우가 더 많을 지도 모릅니다.

      시의 주류가 서정시인 것만 보아도 짐작이 가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감정들을 어떻게 표현해 낼 것인가? 구체적인 예를 통해서 이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무척 화가 난 상태라고 가정합시다.

      분기충천憤氣衝天이란 말이 있는데 분한 기분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쳐 오르는 그런 상태 말입니다. 그런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독자들에게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요?

      다음의 두 가지 표현을 비교해 봅시다.


      가) "나는 지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무척 무척 분하다!"

      나) "나의 가슴은 분노의 용암이 넘쳐흐르고 있다!"


      어느 표현이 더 절실하게 느껴집니까? 물론 가)보다는 나)이겠지요.

      가)는 관념적인 설명이지만, 나)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분노’라는 손에 잡히지 않은 추상적인 정황을 화산이 폭발할 때 흐르는 '용암‘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끌어다 표현했습니다.

      관념보다는 이미지가 우리의 가슴에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시론에서 자주 거론되고 있는 ‘관념의 사물화事物化’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미지 찾기 연습을 다시 시작해 봅시다.

      우선 <기쁨[喜]>의 감정을 적절히 표출해 낼 수 있는 이미지를 찾아봅시다.

      기쁨의 유형과 정도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겠지요.


      ‘이제 막 벙그는 백합’

      ‘환하게 비치는 아침 햇살’

      ‘그리운 이가 보내온 편지’

      ‘…………’


      당신이 과거에 체험했던 것 가운데서 기쁨의 감정을 유발했던 사물들을 하나씩 붙잡아내 보십시오.

      당신의 체험 가운데서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 이제는 당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쁨의 사물’들을 만들어 보십시오.

      머리를 짜고 짜서 당신의 상상력으로 100개를 채우는 데 도전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희의 어떠한 감정도 당신의 상상력에 의해 효율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J. C. Ransom이라고 하는 문학이론가는 시의 유형을 3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가) 관념시(platonic poetry)

      나) 사물시(physical poetry)

      다) 형이상의 시(meta-physical poetry)


      가)는 시인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읊은 시입니다. 주체적 소재가 중심이 된 것입니다.

      나)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노래한 작품입니다. 객체적 소재가 대상이 됩니다.

      Ransom은 주관에 기우는 가)나, 객관에 치우치는 나)의 시를 별로 달갑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를 이상적인 시로 설정했습니다. 다)는 가)와 나)의 통합입니다.

      즉 관념의 사물화가 구현된 작품을 이상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시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이미지)을 빌어서 비유의 구조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관념시라고 다 부정만 할 것은 아닙니다. 교훈적인 시들 가운데는 관념시가 적지 않습니다.


      어버이 살아신 제 섬기기란 다 하여라

      떠나간 후면 애닲다 어이 하리

      평생에 고쳐 못 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옛 시조들은 대개 관념시들이지만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들을 드물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사물시 가운데서도 황홀한 이미지들이 표상된 수작들이 얼마나 많던가요?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꼬 간지러워


      정지용「호수 2」라는 작품입니다.

      호수에서 헤엄치고 있는 오리의 동작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리가 목이 간지러워 호수를 목에 감고 마치 훌라후프처럼 돌리고 있다는 기발한 이미지입니다.

      전에 보내드린 바 있는 「능소화」라는 내 졸시도 ‘화냥년’이라는 단순한 하나의 이미지만으로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랜섬의 말처럼 모든 시가 관념의 사물화를 지향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제나 소재의 성격에 따라 관념시가 효율적인 경우도 있고, 또한 사물시가 더 적절할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다음 편지에서는

      잡아낸 이미지를 어떻게 시로 전개해 갈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물 속에서 경이로운 이미지들을 열심히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제11신]

     이미지를 어떻게 펼칠 것인가

      ―병치의 시법


      로메다 님,

      아주 짧은 시인 경우는 하나의 단순한 이미지만으로 한 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앞에서 예로 들었던 황순원의 「빌딩」이나 「옥수수」 그리고 정지용의 「호수 2」같은 작품이 그러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작품들은 한 개의 이미지에 다른 이미지들이 결합하여 이미저리(imagery, 이미지의 무리)로 발전하면서 시행詩行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행들이 불어나 연으로 확대되고, 다시 그 연들이 불어나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입니다.

      이해하기 복잡한가요?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고 싶은 말이 적으면 짧아지고, 하고 싶은 말이 많으면 길어진다고―.


      오늘은 이미지의 전개 가운데 가장 단순한 구조라고 할 수 있는 병치구조에 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등한 이미지나 생각들을 나란히 늘어놓는 구조입니다.

      다음에 예로 보인 작품은 대등한 이미지 혹은 생각들을 행 단위로 병치해서 만든 것입니다.


       나는 왜 너를 보면 망명亡命을 하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맨발로 파도를 달리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백조왕자가 되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유서를 쓰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이 세상 모두를 뒤집어엎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장미꽃 현란한 꽃비를 보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하늘로 하늘로 금사다리를 놓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천국과 지옥의 합창을 듣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물구나무가 서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또 하나 태양의 부활을 보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길길이 길길이 뛰고 싶니?

                                    ―박두진「해비명海碑銘」전문


      너무 도식적이다 싶을 정도로 단순한 구조입니다.

      ‘바다’를 보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상념과 이미지들을 11개의 행에 각각 담아 대등하게 배열하고 있습니다.

      행과 행의 연결에 어떠한 관련성이나 인접성隣接性도 없습니다.

      작품의 길이도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대상 속에서 다양한 이미지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이런 유형의 시를 우리도 얼마든지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로메다 님, 시에 자신감이 좀 생기지 않았나요?


      다음에 예로 보인 작품은 연 단위의 병치입니다.


       우리의 창이 되어   

       고요히 닫힌        

       그러한 눈.

     

       보석보다

       별을 아끼는  

       그러한 손― 왼 손.

                  

       우리의 뜻을 

       밝게도 장미빛으로 태우는

       그러한 가슴― 둥근 가슴. 

                             

       목소리―우리의 노래인

       맑은 목소리.

     

       우리의 기도를 다소곳이

       눈물에 올리는

       깨끗한 무릎.


       그러한 여인을

       아내로 어미로 맞는

       남자의 기쁨.

       남자로 태어난 기쁨.

         ―김현승「사랑하는 女人에게」전문


      제1연에서부터 제5연까지는 ‘사랑하는 여인’이 지닌 아름다운 것들 가운데 다섯 가지를 들어 연 단위로 병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인이 가진 눈, 손, 가슴, 목소리, 그리고 무릎에 대한 이미지들을 그저 늘어놓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마지막 제6연에 가서 그러한 여인을 가진 것이 남자의 기쁨이라고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로메다 님, 어떻습니까?

      이러한 전개 구조라면 시 만드는 일이 크게 어려울 것도 없지요?

      대상들 속에서 영롱한 이미지들만 끌어낼 수 있다면 말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도 한 편의 시를 만들어 봅시다.

      「사계四季」라는 제목을 걸겠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이 지닌 이미지들을 하나씩 붙잡아 내서 4행 혹은 4연의 병치구조로 된 작품을 만들어 보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의 과제입니다.


      말복이 지나자 매미 소리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군요.

      남도는 지금 자미화紫薇花가 한창이라고 합니다.

      끝에 담아 보낸 그림은 며칠 전, 어느 독자로부터 받은 명옥헌鳴玉軒의 자미화입니다.

      세상에 자연처럼 황홀한 것은 없습니다.

      음미하면서 마지막 더위를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주] 자미화紫薇花 : 목백일홍, 배롱나무꽃

      [주] 명옥헌鳴玉軒 : 담양 고서에 있는 정자. 광해조 때 은사隱士였던 오희도(吳熙道, 1583~1623)를 추모하기 위해 그의 넷째 아들 이정以井 오명중吳明中이 세운 것으로, 연못 주변의 오래된 배롱나무들이 운치를 돋구고 있음. 개울물이 옥구슬 부딪는 소리를 낸다고 하여 명옥헌이라 했다고 함.


                                                                                                               -『우리』 7월호에 계속.

                                                                                          


    출처 : 우리시회(URISI)
    글쓴이 : 연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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