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시창작 관련

[스크랩] [연재 2회] 영롱한 언어의 사리舍利 外

밝은하늘孤舟獨釣 2009. 6. 21. 21:14

                        임 보 시인의 알기 쉬운 시 창작교실


 

                      영롱한 언어의 사리舍利 [연재 2회]

                                                        임 보 (시인 • 전 충북대 교수)

 

 


[시작하며]


  이 글은 시를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쓴 시 창작에 대한 안내서입니다. 이론적인 책들이 일반적으로 갖게 되는 딱딱함을 덜기 위해 서간체 형식으로 엮었습니다.

  시인인 저자가 시를 알고자 하는 『로메다』라는 한 젊은이에게 좋은 시를 쓰는 요령에 대해 일러주는 편지글입니다.

  시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세계와 삶에 대한 사색적인 문제도 다루고 있습니다. 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세계관과 인생관 형성에 도움을 주고자 해서입니다.

  이 글은 애초에 인터넷을 통해 연재되었던 것인데 독자들의 요구에 의해 다시 월간 『우리詩』에 연재하게 된 것입니다.

  부디 이 글을 읽는 이들의 시와 세상에 대한 안목이 크게 열리기를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2009년  4월

                                                                 임  보  씀


[제3신]

영롱한 언어의 사리舍利


  로메다 님,

  보내주신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지금 이 글을 씁니다.

  지난번 편지는 시가 무엇인가를 묻는 물음에 답하는 글이었는데, 막상 써 놓고 보니 시를 이해하고자 하는 로메다 님을 오히려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만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군요.

  읽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하면서 보내드린 첨부자료 <시에 대한 정의들>까지도 다 읽었다고요? 건실한 모범생이군요. 이해가 잘 되던가요? 아마 시를 이해하는데 별로 큰 도움이 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미리 그런 글을 읽어둔 것도 언젠가는 혹 도움이 될지 모르니 잘 하셨습니다.


  나는 지난번 편지에서 시라는 글은 너무 변화무쌍한 것이어서 절대불변의 정의를 내리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상의 모든 시에 대해 한꺼번에 다 알려고 하지 말고 욕심을 줄여, ‘오늘의 우리시’에 관해서만 관심을 갖도록 해 봅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늘의 한국 현대시처럼 쓰기 쉬운 글은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쉽게 납득이 안 가겠지요? 시는 원래 일정한 형식을 요구하는 정형시였습니다. 말하자면 시가 될 수 있는 필요조건이 있어서 그 조건을 갖추지 못한 글은 시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한시漢詩의 대표적인 정형시인 절구絶句의 경우를 생각해 볼까요?

  ① 우선 4행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② 각 행의 글자 수를 5자이거나 혹은 7자로 통일해야 하며

  ③ 짝수 행의 끝에 같은 종류의 소리[韻]를 달아야 하는 등 그밖에도 복잡한 평측법平仄法에 의해 글자 배열을 통제했습니다.


  서구의 대표적인 정형시인 소네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① 전 14행으로 각 연들이 4, 4, 3, 3행의 4연으로 구분되고

  ② 각 행의 음절수가 나라에 따라서 10~12음절로 제한되며

  ③ 각 행의 끝에 규칙적인 압운押韻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로메다 님,

  이런 번잡한 내용들을 염두에 둘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정형시가 매우 복잡한 조건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됩니다. 정형시가 주도하던 당시에는 언어에 대단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고는 시인이 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시는 평민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귀족문학으로 군림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정형시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우리의 대표적인 정형시는 시조인데 정해진 규칙이 별로 엄격하지 않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평시조의 형식은

  ① 전 3행으로 되어 있고

  ② 각 행은 4음보(4어절, 4마디)이며

  ③ 다만 제3행(종장)의 처음 두 음보가 3음절과 5음절이라는 제약이 있을 뿐입니다.

  행의 끝에 동류의 음을 달아야 한다는 압운의 규제도 없고 한 음보를 이루는 음절의 수효도 고정되지 않고 유연합니다. 숫자를 헤아리는 데 있어서도 ‘서넛’ ‘대여섯’ 같은 용어들을 즐겨 사용하는 걸 보면, 애초부터 우리 민족은 융통성을 지녔던 것 같습니다.

  어떻든 정형시는 구속의 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풍조가 변하다 보니, 즉 군주주의가 허물어지기 시작하고 개인의 주권과 자유를 옹호하는 풍조가 일어나면서, 구속과 통제의 문화들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런 자유의 물결 속에서 시도 속박의 틀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래서 자유시가 비롯된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자유시는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습니다. 행도 마음대로 나누고, 행을 나누고 싶지 않으면 산문처럼 이어 쓰기도 합니다. 소재의 제한도 없고 운율에 대한 배려도 거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무엇이든 아무렇게나 써도 상관없는 글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쓰기 쉬운 글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로메다 님,

  시를 쓰기는 쉽지만 좋은 시를 쓰기는 쉽지 않습니다. 마치 누구든 그림을 그릴 수는 있지만, 좋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 쉽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시란 어떤 글일까? 어떻게 쓴 시가 좋은 글, 바람직한 글이겠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글입니다. 즉 감동을 주는 글이지요. 무엇을 어떻게 쓰든 독자의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만 있다면 나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심오하고 훌륭한 내용을 담았더라도 독자를 감동시킬 수 없는 글이라면 나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감동적인 글’ 만들기가 쉽지 않군요.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인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나는 그 요인들 가운데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을 ‘아름다움’으로 잡습니다. 바람직한 시 곧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시가 되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즉 시란 ‘아름다운 언어들의 결집’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학생들에게 시에 대해 정의하기를 ‘영롱한 언어의 사리舍利라고 합니다.

  절에서 스님들이 세상을 떠날 때 다비茶毘, 화장을 하지 않습니까? 육신이 다 타고 남은 재 속에서 영롱한 결정체結晶體가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를 사리舍利라고 부릅니다. 고승의 경우일수록 많은 사리를 얻게 된다고 합니다. 불타는 육신 속에서 만들어진 영롱한 결정체, 사리는 참 신비로운 보석처럼 느껴집니다. 그 사리는 고승의 육신과 정신과 불과 그 밖에 우리가 알 수 없는 수많은 요소들이 협동하여 빚어낸 아름다움입니다. 사리는 고승의 육신으로 빚어낸 시(X)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수십만 어휘의 숲 속에서 작업을 합니다. 그들은 마치 직녀織女가 필요한 색실을 하나씩 뽑아 비단에 아름다운 수繡를 놓아가듯이 필요한 언어를 하나씩 선택하여 아름다운 언어의 결정체를 만들어 갑니다. 선택된 언어와 언어들이 잘 결합하여 해조諧調를 이루면 영롱한 빛이 납니다. 시는 수만 개의 어휘들 가운데서 선택된 몇 개의 언어들이 아름답게 결합된 영롱한 결정체― 곧 언어의 사리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영롱한 언어의 사리를 빚을 것인지 그것이 우리가 풀어가야 할 과제입니다.


  로메다 님,

  오늘도 얘기가 길어졌군요. 그러나 시에 대해 어리둥절하기는 아직도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너무 조급히 생각지 마세요. 시는 이미 당신 곁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있을 것입니다.

  장마가 그치려는지 드리운 능소화 줄기 사이로 햇살이 환합니다. 주황빛 꽃이 시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짤막한 시 한 편 보냅니다.



지가 무슨 화냥년이라고

분홍 속살 다 드러내 놓고

남의 집 담장에 기어올라

한여름을 흔들며 가네.

-졸시 「능소화」 전문




[제4신]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로메다 님,

  어제는 친구들과 함께 산엘 올랐다고요? 신록이 우거진 싱그러운 자연 속에서 즐거운 한때를 지냈다니 잘 하셨습니다.

  지난번에 시를 일러 ‘영롱한 언어로 빚은 사리’라고 했더니, 그 사리를 어떻게 빚어내는가 알고 싶다고 조급히 물어왔군요. 네 좀 기다리세요. 차차 말씀드릴 겁니다.

  오늘은 그 '사리'를 찾아 헤맸던 내 유년의 얘기를 들려주고 싶은데 궁금하지 않으세요?

내가 처음 시를 만났던 어린 시절의 얘기 말입니다.


  나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벽지에서 자랐습니다. 지금은 내 고향 마을 앞으로도 고속도로가 뚫리어 많은 차들이 바삐 지나다니게 되었습니다만, 내가 중학을 다니던 당시만 해도 세상과의 내왕이 쉽지 않은 깊은 두메산골이었답니다. 나는 우리 집에서 한 시오리(6km)쯤 떨어진 곳에 새로 설립된 중학교의 두 번째 학년에 입학하게 됩니다.

  한 학년이 한 클래스, 전교생이라고 해봐야 200명이 채 안 된 보잘 것 없는 아주 작은 가난한 학교였습니다. 내가 2학년으로 올라가던 이른 봄에 한 젊은 멋쟁이 선생님이 그 학교에 부임해 오셨습니다. 이마가 시원스럽게 열린, 검은 베레모에 짙은 갈색 선글라스를 즐겨 쓰신 키가 훤칠한 체육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선생님의 체육 수업은 운동장이 아닌 교실에서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칠판의 상단에 체육 이론에 관한 제목은 커다랗게 써놓았지만, 진행되는 수업의 내용은 체육과는 상관없는 세계 명작 소설들을 들려주는 ‘이야기 시간’입니다. 혹 교장 선생님의 복도 순시가 있을지 모르니까 교실 출입구 곁에 한 학생을 보초로 세워놓고 우리들은 숨을 죽여 가며 선생님의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에 빠져들곤 했지요.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면 얼마나 아쉬웠던지, 지금도 그때의 정경이 눈앞에 선합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선생님의 전공은 체육이 아니라 국어였습니다. 우리 학교의 빈 체육교사 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분이 오셨다고 하니 6・25전란을 겪고 난 뒤, 당시의 행정이 얼마나 엉성했던가를 단적으로 엿보게 하는 일화이기도 합니다. 국어교사가 체육 수업을 하려니 얼마나 곤혹스러웠겠습니까?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섹스피어의 『햄릿』, 토마스 하디의 『테스』, 토스터에프스키의 『죄와 벌』, 톨스토이의 『부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등 세계명작들의 아름다운 문학 세계를 간접적으로 접하게 됩니다.

  그 선생님께 홀딱 빠진 나는 방과 후 선생님의 하숙방엘 자주 찾아갔습니다. 그러면 어떤 때는 누군가가 보낸 아름다운 편지를 읽게도 하고, 어떤 때는 당신이 쓰신 시를 낭독하게도 했습니다. 내가 낭랑한 목소리로 읽으면 선생님께서는 목침을 베고 아랫목에 누워서 눈을 지그시 감고 들으시곤 했습니다.

  당시의 어린 나는 그때 읽었던 편지와 시의 내용들을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편지는 선생님을 사모하는 어떤 여인이 보낸 것 같았고, 시는 선생님의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것 같았습니다.


  저도 그처럼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을까요? 묻는 어린 제자에게 스승은 매일 일기를 열심히 쓰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소장하고 있던 문학서적들을 빌려주셨습니다.

김동인과 김유정의 소설들, 소월과 영랑 그리고 청록파의 시들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

  그 뒤부터 나는 날마다 일기를 열심히 썼습니다. 아니, 일기뿐 아니라 일기의 끝에 매일 시를 썼습니다. 시도 아닌 유치한 글들을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썼습니다. 전기도 없었던 시절 어두운 등잔불 밑에서 펜촉에 푸른 잉크를 무쳐가며 검은 딱지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질이 낮은 마분지 노트에 매일 밤이 깊도록 열심히 썼습니다.

  그 시절의 기록들을 나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데, 가끔 꺼내보면 참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도 아마 그보다는 더 잘 쓸 것 같은 그런 아주 형편없는 유치한 것들이었으니까요. 아마 나도 선천적인 글재주는 별로 타고난 것 같지 않습니다.


  로메다 님, 일기를 쓰십니까? 일기를 쓰느냐고 학생들에게 물으면, 비밀스런 내용들이 혹 탄로 날까 두려워 쓰다가 중단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감추고 싶은 것은 쓰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글을 쓰는 행위와 친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에 익숙해 있듯이 글도 자주 쓰면 말하는 것처럼 능숙해질 수 있습니다.

글과 친숙해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매일 일기를 쓰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좋은 방법은 편지를 자주 쓰는 것입니다.


  나에게 시의 바람을 불어넣었던 그 스승은 1년 뒤에 다른 학교의 국어 교사가 되어 떠나셨습니다. 그 뒤로 스승과 어린 제자 사이에 사흘이 멀다 하고 수많은 편지들이 오고갔습니다. 나는 선생님의 아름다운 문장과 멋스러운 필체를 따라가려고 밤을 새워가며 편지를 고쳐 쓰곤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버린 편지지가 머리맡에 수북했습니다. 지금의 내 필체 속에는 그 선생님의 것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내가 오늘날 이만큼의 문장력이라도 지니게 된 것은 아마도 유년시절의 일기와 그 편지들 덕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은 시 쓰기에 앞서 산문 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바른 산문을 쓸 수 있는 문장력을 갖춘 다음, 시에 들어가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바른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도 없으면서 처음부터 시의 욕심을 부리는 것은 마치 데생(dessin)의 실력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처음부터 추상화에 달려드는 경우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로메다 님, 귀찮더라도 매일 일기를 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글의 친구가 되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그리고 좋은 글벗을 만나 그분과 자주 글을 주고받기 바랍니다. 남에게 보이는 글에는 더 정성이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일기는 당신을 글과 친숙하게 만들 것이고, 편지는 당신의 문장을 정련精鍊시킬 것입니다.


  오늘은 유년의 아름다운 동산에서 내가 시를 처음 만났던 얘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시의 꿈 소중히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제5신]

시의 한 독자에게


  로메다님, 내 글을 읽고 일기 쓰기를 다시 시작하셨다고요? 잘 하셨습니다. 가능하면 마음에 맞는 친구에게 긴 편지도 자주 써 보시기 바랍니다.

  글을 잘 쓸 수 있는 길은, 옛날 중국 송나라의 문인 구양수歐陽修가 일찍이 간파했던 삼다三多의 교훈을 능가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삼다는 다독多讀 다작多作 그리고 다상량多商量이 아닙니까? 좋은 글을 많이 읽고, 자신이 손수 글을 많이 써 보고, 그리고 생각을 늘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써 놓은 좋은 글을 우선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좋은 글을 어떻게 고를 것인가에 대해 오늘은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침 내가 이미 써놓은 「시의 한 독자에게」라는 서간체의 수필이 있군요. 그것을 먼저 보여드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시를 좋아한다고요? 그래서 시를 즐겨 읽는다고요? 시의 무엇이 그렇게 좋던가요? 시를 읽고 나면 마음이 평온해지던가요? 어떤 시들을 즐겨 읽나요? 달콤한 사랑의 시가 좋던가요?  날카로운 풍자시가 마음에 들던가요? 아니면 깊은 사색의 시에 매력을 느끼나요?

  아무튼 현대와 같은 각박한 시대에 아직도 시라는 것에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당신을 보니 꽤나 딱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남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돈이 되는 일에 매달려 아귀다툼인데, 당신은 생계에 하등의 보탬도 되지 못한 그 시라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니 그렇지 않습니까? 그거야 평생 시에 매달려 살아가는 시인들도 있는데 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딴은 그렇군요.

  당신을 보면 가난한 자선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렵게 행상을 해서 모은 전 재산을 양로원이나 보육원 같은 곳에 희사하는 분들 말입니다. 또한 외로운 낙도를 전전하면서 어려운 섬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해 주며 살아가는 선량한 의료인들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아마도 당신은 실리에 무척 밝거나 세상살이에 너무 영악스럽지도 못하지요? 어딘가 수더분하고 인정이 넘치는 그런 사람일 것 같군요. 남의 말을 잘 믿고 슬픈 영화를 보면 눈물도 쉬 흘리지요? 네 틀림없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이 세상을 보다 평화롭고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꽤나 괜찮은 분입니다. 신이 만일 내게 이상적인 공화국을 하나 만들도록 허락해 준다면 그 나라의 일등 시민으로 당신을 가장 먼저 초대하고 싶습니다. 당신을 보면 ‘딱하다’는 느낌이 든다는 처음의 내 발언은 본심과는 전혀 다른 역설임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요즈음의 시들이 어렵다고요? 잘 이해할 수도 없는 골치 아픈 시들이 적지 않다고요? 그런 시들은 읽지 마세요. 당신을 괴롭히는 그런 글들은 그냥 팽개치세요. 그래도 차마 그럴 수 없다고요? 역시 무척 착하시군요. 그러나 당신처럼 그렇게 선량한 독자를 괴롭힌다면 이는 고약한 시인임에 틀림없습니다. 남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만의 아집에 사로잡힌 고집스런 자임에 틀림없을 테니까요. 그들은 당신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시들을 읽는 게 바람직하냐고요? 글쎄요. 추천하기가 쉽지 않군요. 감미롭게 속삭이는 출판사의 화려한 광고에 현혹되지 마세요. 그럴듯한 신문기사나 비평가의 서평에도 넘어가지 마세요. 겉으로는 공정한 척하지만 그들은 어쩌면 당신의 편이 아니라 출판사의 편일 수도 있습니다.

  베스트셀러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지 마세요. 지나치게 달콤한 맛이 나는 작품들도 경계하세요. 조미료와 설탕의 힘을 빌어 만든 음식에 잘못 길들면 우리의 미각을 잃고 드디어는 건강까지도 해를 입게 되지 않습니까? 작품도 그렇습니다. 당신이 지불할 인세에 마음이 팔려 사탕발림의 글을 쓰는 자들도 적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유명한 시인의 작품을 골라 읽는다고요? 그 방법도 별로 권장하고 싶지 않군요. 세상 사람들을 보세요. 유명한 사람치고 훌륭한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특히 살아 생전에 이름을 얻은 사람 가운데 믿을 만한 사람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유명한 시인 가운데는 차라리 정치가가 되었더라면 더 어울리겠다 싶은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수상受賞 경력이 많은 시인의 작품을 골라 읽는다고요? 글쎄요. 그 방법도 별로 찬성하고 싶질 않군요. 그것은 상賞이 공정하게 시행되는 사회에서나 기대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요.

  시와 시인에 대해 너무 부정적으로만 얘기해서 혼란스럽지요? 아무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요란한 시인들의 작품은 읽지 마세요. 그들의 작품을 읽어 주기엔 우리들의 생애가 너무 짧습니다. 그러한 작품들은 당신이 아니더라도 눈먼 독자들이 많이 읽어 줄 테니까 미안해 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마치 흙 속에 묻혀 빛을 보지 못하는 보석처럼 소중한 작품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한 작품들은 당신 같은 현명한 독자들이 찾아 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지요. 차라리 선배나 친구가 읽고 권하는 시집을 읽으세요. 가능하면 책방에 들러 스스로 읽어보고 믿을 만한 시인이 누군가를 찾으세요.

  예술은 결코 양이 아니라 질이 문제입니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천 명의 잡다한 작곡가보다는 하나의 모차르트입니다. 저질의 예술품들은 세계를 정화하기는커녕 지상을 어지럽히는 공해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양질의 시를 찾아 읽으세요. 그런 시의 주인공― 당신이 존경할 만한 시인은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어딘가에 지금 묻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를 찾아보세요. 그는 그늘진 곳에서 혼자 외롭게 유서를 쓰듯 시를 쓰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시인을 하나 찾아 그의 후원자가 되세요. 물질적으로 돕는 후원자가 아니라, 그가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 시를 쓸 수 있도록 격려를 보내주고, 때로는 그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후견인이 되세요. 그의 아름다운 시를 주위 사람들에게 소개도 하고 혹 그가 모처럼 소중한 시집을 만들어냈다면 그의 시집을 몇 권 사서 가까운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세요.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별로 대단한 도움이 못된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시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간절할 때 당신은 불행한 한 시인의 생명을 건질 수도 있습니다. 어떤 비관적인 한 시인이 세상을 떠나려고 독배를 들려는 순간 그대가 보낸 한 통의 편지를 읽었다고 칩시다. 그리고 생면부지의 독자로부터 그의 작품에 대한 찬사를 들었다면 그의 죽음은 잠시 유예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잠시가 아니라 평생 유예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시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지상에 시인다운 시인은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 시가 사라지지 않고 존속될 수 있기를 원하십니까? 시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곧 시의 생명입니다. 당신이 좋은 시들을 찾아 읽는 한, 이 지상에서 훌륭한 시인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시의 수호자입니다.


  로메다 님, 읽기가 좀 지루했나요? 시를 좋아하는 한 독자에게 보내는 글이었습니다. 좋은 책 고르기가 힘들면 우선 고전부터 읽으시기 바랍니다. 좀 낡았더라도 이미 정평이 나 있는 책들을 고르십시오. 이 책들은 긴 세월을 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검증된 것이니까 비교적 안심하고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집이나 소설 등 문학서적들뿐만 아니라, 역사나 철학 그리고 과학에 이르기까지 다른 분야의 고전들도 소홀히 하지 말고 열심히 읽으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읽은 좋은 책들이 언젠가는 당신이 좋은 글을 쓰는데 보이지 않은 자양분이 될 터이니까요. 오늘도 즐거운 하루 지내시길 바랍니다.

 

                                                                                                  - 월간 『우리詩』2009. 4월호


 

임 보 시인


약 력

1962년 서울대학교 국문과 졸업.

1962년『現代文學』지를 통해 詩壇에 등단함.

1988년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전 충북대 국문과 교수.

현재 우리詩진흥회 명예이사장, 월간『우리詩』편집인.


논 문

『한국현대시 운율연구』『한국현대산문시 운율연구』『시인의 세 시각』

『한국현대시 압운 가능성에 관한 연구』『단형시고短形詩考』『정지용 산문시 연구』

『서정주 시의 율격적 특성』『「접동새」考』『정호승鄭昊昇시문학 연구』

『육당의「太白山賦」와「太白山의 四時」』『「님의 침묵」의 님의 한 양상에 대하여』

『박목월 초기시의 선적仙的요소』


詩 集

『林步의 詩들 59-74』『山房動動』『木馬日記』『은수달 사냥』『황소의 뿔』

『날아가는 은빛 연못』『겨울, 하늘소의 춤』『구름 위의 다락마을』『운주천불』

『사슴의 머리에 뿔은 왜 달았는가』『자연학교』『장닭 설법』『가시연꽃』등이 있음.


저 서 『현대시운율구조론』『엄살의 시학』등이 있음.

 

 

출처 : 우리시회(URISI)
글쓴이 : 연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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