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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과일이 익을 때까지 / 도종환 (1954-)현대시/한국시 2009. 11. 23. 14:16
하나의 과일이 익을 때까지 / 도종환 (1954-)
<접시꽃당신> 중에서
하나의 과일이 익을 때까지
우리는 오랜 날 당신을 기다립니다
빗줄기가 우리의 온몸을 흔드는 밤이면
우리는 그 빗발이 다할 때까지
당신을 생각하며 비를 맞습니다
소소리바람이 몇 달을 두고
우리의 가지를 꺾으려 할 때
우리는 그 바람 속에서
바람이 다하는 날 새로이 오실
당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바람 앞에 온몸을 세워놓습니다
때로 우리의 살을 깎는 것들이 끝없이 달려오고
때로 우리가 한없이 버림받으며 있어도
하나의 과일이 익을 때까지
우리는 오랜 날 당신으로 이겨냅니다
어둡고 지리한 구름이 끝없이 머리를 덮고
뜨거운 화살들 껍질마다 꽂히고
새벽이 가장 가까워오는 시간마다
몸서리치며 빼앗겨야 하는 내 몸 속의
얼마 남지 않은 따스함마저 잃었을 때도
우리는 다 비우고 난 뒤의 넉넉함으로
다시 당신을 기다랍니다
하나의 과일이 익을 때까지
우리는 오랜 날 당신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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