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시창작 관련

[스크랩] [2010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밝은하늘孤舟獨釣 2010. 1. 13. 12:04



[2010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팝나무에 비 내리면 / 황종권

  
  당신은 육지를 떠나기 전이면 뒤뜰에 있는 이팝나무 아래로 불러내곤 했지요. 이팝나무 한 뼘 위를 회칼로 그으며, 그만큼 자라면 온다고 무슨 굳센 다짐처럼 말하곤 했지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팝나무 아래에서 키를 재어 보았는데요. 키 대신 등짝에 파도소리가 자라곤 했었지요. 해가 기울수록 길어지는 그늘은 내가 미리 살아버린 주름이었을까요. 이팝나무는 꽃을 버릴 때마다 나이테가 늘어갔던 거예요.

  먼 바다에서 당신배가 물결을 가를 때마다 일어나는 물살이, 제가 엉덩이 깔고 앉아 있는 포구 끝에도 닿는 것일까요. 하얗게 터지는 물살에선 목욕탕 스킨냄새가 나네요. 바다가 물결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물결이 바다를 그물처럼 가두고 있단 생각을 했어요. 바다가 당신의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다의 것이었거든요.

  어둠이 달을 꽉 가두고 있는 밤은 비가 내렸지요. 어김없이 부엌은 생선 굽는 냄새에 몸살을 앓았고요. 저녁상에 올라 온 민어를 뒤집다가 손등을 얻어맞기도 했어요. 하늘에서도 물고기가 튀는 것일까요. 유리창에 맺히는 빗소리에선 심한 비린내가 나요. 그런 날은 이불속에서 뒤척거리는 일도 조심스러워요. 나는 당신에게 수평선을 그어 주던 아이였을까요.

  당신의 주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던 달의 인력이 오늘밤은 시린 손가락으로 내 발목을 잡는 걸요. 밀물 든 바닷가에선 빗소리가 주저 앉고요. 잃어버린 당신의 키는 언제쯤 만조를 이룰 수 있을까요. 사리※와 같은 당신과 나와의 거리에선 빗소리가 쌓이지요. 비가 오는 밤은 달이 이빨이 아픈 꿈을 꾸는 건가 봐요. 이팝나무에 빗소리를 그어놓으면 우린 한 뼘 지워질 수 있을는지요.


※사리 : 달은 음력 한 달을 주기로 지구 주위를 공전하면서 보름과 그믐에 태양, 지구, 달이 일직선 위에 있게 되는데 이때는 태양의 인력이 합쳐지면서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가장 크게 되며 ‘사리’라고 한다.


[심사평]


현실 ·상상력 잘 버무려 절실함 담아

  
  최근 우리 시단에는 체험이 결여된 시들이 대거 발표되고 있다. 시를 위한 시들의 언어적 개성을 추구한 시보다는 독자들에게 실질적인 감동을 주는 시를 심사의 중요한 기준으로 했다. 그 결과 예심을 통과한 시 중에 ‘이팝나무에 비가 내리면’, ‘은갈치 상자에서는 달빛 냄새가 난다’, ‘부재중’, ‘장생포에서’ 등이 최종 심사대상이 되었다.

  ‘장생포에서’는 시를 끌어가는 추진력을 갖추고 있고 대체로 유려한 시행을 구사하였지만 종결어미의 처리 미숙으로 인해 상상력이 반감되어 고래의 꿈이 생명력 있는 꿈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 ‘부재중’은 아버지의 부재를 드러내 주는 감나무, 외양간, 빈집 등을 평이한 언어로 자연스럽게 전개한 시이지만 너무 많은 사물을 등장시켜 평면적으로 흐른 것이 약점이었다.

  ‘이팝나무에 비가 내리면’과 ‘은갈치 상자에서는 달빛 냄새가 난다’ 두 편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시적 구성의 단단함과 언어를 다루는 능력이 돋보여서 한 편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은갈치 상자에서는 달빛 냄새가 난다’에서는 “갈치상자에서 달빛 냄새가 난”다라든가 “달빛을 물고 달려드는 지느러미의 물결”로 표현된 상상력이 “은빛 매니큐어를 칠해보는 일이 평생소원이라던 생선 아줌마”의 현실적 염원과 적절히 결합하였지만 후반부에 이르러 묘사의 밀도가 떨어져 더 강력한 시적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다.

‘이팝나무에 비가 내리면’은 삶의 진정성을 바탕으로 자유로운 상상력을 잘 보여준 시이다. “키 대신 등짝에 파도소리가 자라곤 했”다라든가 “달이 이빨이 아픈 꿈을 꾸는” 등, 현실과 상상력이 잘 결합되어 새로운 의미망을 형성하면서 그 절실함을 담아내었다. 응모자의 다른 투고작품들도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도 당선작 결정에 참조가 되었다. 당선된 분에게는 축하를 보냄과 더불어 아쉽게 탈락한 분들에게 격려의 말을 보내드린다.

심사위원 : 최동호

출처 : 시와 인연
글쓴이 : 양애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