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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펌>종교개혁은 교파분열의 발단인가?
    아름다운 인생/종교 2010. 11. 5. 10:57

    종교개혁은 교파분열의 발단인가?
    -대화문화아카데미 교회사 쟁점 논란
    2010년 10월 30일 (토) 10:04:36 한상봉 기자 isu@nahnews.net

    "종교개혁자들은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아낼 종교의 그릇을 만들고자 했던 자들로 그리스도교 이야기의 중심에서 이탈한 '탕아'가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분열이 아니라 역사의 분수령이었다."

    10월 31일 종교개혁 기념일을 앞두고, 지난 10월 29일 서울 평창동에 있는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종교개혁이 교파분열의 발단인지, 묻는 이야기마당이 열렸다. 이날 발제를 맡은 김주한 교수(한신대)는 "질문 자체가 중립적이지 못하다"고 문제 삼았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서방기독교세계의 분열을 가져왔다는 주장은 원인을 배제하고 결과만 문제삼는 발언이라며 "사실 교파분열이 악"이라는 전제 자체를 다시 생각해보자고 주문했다. 

    다만 한국사회에서 교파분열을 문제삼는 것은 "지금까지 종교가 인류를 분열시키고  국가 간 분쟁의 최대씨앗이 되어버렸으며, 사회통합의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라며, 한국 개신교의 경우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서 주류를 자처하는 개신교회들이 종교를 개인적 신앙으로 치부하고, 권력화되어 사회적 공신력을 잃어버렸다고 비판했다. 그런 점에서 "16세기 종교개혁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문제들에 대한 투쟁이었다"고 말했다.  

       
    ▲ 1520년 12월 20일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 교정에서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교황 레오10세의 파문장을 불태우는 루터.(그림/파울 투만)

    루터는 위대한 예언자인가, 이단자인가?

       
    ▲ 김주한 교수는 교파분열이 반드시 나쁜 결과만 낳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다양한 성경해석과 교회유형의 가능성이 열리기도 했다고 말한다(사진/한상봉기자)
    김주한 교수는 종교개혁을 둘러싼 담론을 먼저 정리하면서, 먼저 종교개혁을 '루터'라는 개인을 통해 이해하는 것은 종교개혁을 역사적 연구가 아니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미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루터를 이스라엘의 예언자나 고대 교회의 교부들보다 더 위대한 신의 사자라고 말하며, 종교개혁이 루터 개인의 신앙체험이 아니라 교회를 개혁하라는 하느님의 소명에 대한 응답이라고 이해한다.

    한편 성서역사비판학의 선구자 요한 제믈러는 종교개혁을 교황권의 약화와 교육, 인쇄술의 발전 등 교황권의 독재에 항거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마련된 상태에서, 자유와 양심의 해방을 쟁취하기 위해 일어난 사건으로 본다. 이 상황에서 당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개혁을 간절히 바라는 대중의 열망에 부응해 뒤따라 교회형태를 재조정한 게 종교개혁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종교개혁이란 '봉건주의로부터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부르주아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일어난 첫번째 유산계급 혁명"으로 보면서, 토마스 뮌처를 중심으로 뒤이어 일어난 농민혁명에 비교해 실패한 혁명으로 본다. 마르크스는 종교개혁을 이렇게 평했다.

    "루터는 권위로 가득찬 신앙을 산산조각 냈다. 왜냐하면 그는 신앙의 권위를 회복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사제를 평신도로 만들었다. 왜냐하며 그는 평신도를 사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외적인 종교권력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다. 왜냐하면 그는 종교성을 인간의 내적인 차원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육체를 외적인 사슬로부터 해방시켰다. 왜냐하면 그는 마음을 사슬로 묶었기 때문이다."

    한편 엥겔스는 당시 독일농민전쟁이 실패한 이유가 종교개혁자들의 보수적 신학 때문이었다고 평가한다. 루터가 부르주와 귀족들에게 자신을 의탁함으로써 농민전쟁을 실패하게 했으며, 농민저쟁 지도자인 토마스 뮌처가 진정한 영웅이라고 말한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종교개혁의 개인주의와 독립정신 등이 자본주의 정신을 낳았다고 주장했는데, 반면에 에른스트 트륄취는 종교개혁은 여전히 중세적이어서 개인의 자유와 자율을 옹호하기는커녕 보수적인 교회유형으로 남아있으며, 차이가 있다면 단일 공동체를 지향했던 중세와 달리 종교개혁은 그 보편적 교회문화의 이상이 깨지고 지역단위의 보다 작으 구조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교회가 발전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한편 종교개혁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반응은 감정이 뒤섞인 무차별적이고 인신공격적 발언들로 채워져 있다고 비판했다. 루터를 파문했던 교황 레오10세는 루터를 "조심스레 가구어 놓은 포도원을 파헤친 멧돼지"라고 말했으며, 이에 루터는 교황을 "지옥을 가장 많이 닮은 사제'라고 받아쳤다. 가톨릭역사가들은 종교개혁을 악마적 소행이며, 이단의 역사라고 평하였고, 되링거는 종교개혁을 "죄와 악의 문제에 대한 루터의 병적인 선입견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또한 요하네스 얀센은 "중세 후기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이 공격했던 것처럼 그렇게 타락한 '나쁜 교회'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건강하고 활력있는 교회였다"고 평가하면서, 당시 성서번역작업과  종교예술의 만개, 경건서적의 출판 등으로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충분한 동력을 갖추고 있었다며 "루터의 결정적인 오류는 이러한 자원들이 이미 작동하고 있음을 보지 못한데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루터는 교회전통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며 중세문화를 파괴했다고 비판한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종교개혁이 복음의 원형을 회복한 사건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민중의 누적된 불만이 표출된 것  

    김주한 교수는 비교적 객관적인 평가를 내린 사람으로 죠셉 로츠를 꼽았다. 로츠는, 루터가 토마스주의보다는 오캄주의 전통에서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중세후반 기성교회 안에 만연한 부패현상을 가톨릭신앙과 동일시한 데 비극이 있다며 "루터가 주장한 대로 과연 중세교회가 그렇게 타락한 요소를 교회의 본질로 삼고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더불어 김 교수는, "종교개혁은 사면권(대사부) 판매라는 비열한 기만적 행위에 대한 항의로 시작되었으며, 새로운 질서를 갈망하던 대중의 저항과 교회에 대한 대중의 누적된 불만이 표출된 사건임은 분명하지만, "종교개혁의 의미를 과도하게 부풀린 나머지 개신교가 복음의 원형을 회복했다거나 로마가톨릭과 확연히 다른 지적이고 도덕적인 기초 위에 교회를 다시 세웠다는 주장은 그후 150여 년동안 전개된 역사적 경험으로 보아 살득력이 없다고 평가했다. 종교개혁 이후 종교적 불관용의 시대를 맛보아야 했던 대중의 눈에는 폭력성과 공격성, 자기중심성이라는 점에서 개신교 역시 가톨릭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아가 김주한 교수는 성경을 토대로 개혁을 부르짖던 측과 전통과 권위를 고수하려던 가톨릭의 극단적 대결은 타협이 가능했을까? 물으면서, 양자를 중재하려던 노력 가운데 '비아 미디아(via media, 중용;중도)를 주장했던 에라스무스에게 주목한다. 에라스무스는 학문의 대가답게 가톨릭교회가 떠받들고 있던 교계제도, 성경, 교회문헌, 교부들의 진술, 교리 등을 꼼꼼이 재검토해 대중들을 무지와 야만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새로운 질서를 꿈꾸었다. 그의 글들은 당대 성직자들의 타락과 교회 및 교리의 불합리함을 신랄한 풍자와 독설을 드러냈다.

    극단적 대결의 시대에 에라스무스의 중도주의는 실패할 운명 
    "종교적 관용이 화해와 일치의 길이다"

    에라스무스는 교회의 정신이 개혁되고 계몽된다면 가톨릭교회의 제도와 교리상의 문제들이 자연스레 해결되리라 믿었는데, 그는 성경을 개혁의 표준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비슷했지만, 평화와 일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달랐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들고 나왔을 때만해도 에라스무스는 루터에게 뜨거운 동지애와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나 루터가 정치권력에 의존하면서 빚어진 이전투구를 보면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당시 에라스무스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결별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나는 더 좋은 것이 발견될 때까지 이 교회와 함께 할 것이다... 두 악 사이에 놓인 중간노선을 항해하는 사람은 서투르게 길을 헤쳐나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에라스무스는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며, 화해와 타협을 통해 세속군주와 교황, 종교개혁가들이 합의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호소는 식자층에게는 받아들여졌지만, 루터는 대중의 정서와 권력의 힘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 간파했으며, 세속권력을 자신의 종교개혁에 적극 활용했다. 결국 "개혁은 좋다! 그러나 루터식의 종교개혁은 싫다"고 외치던 에라스무스의 중도적 길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김주한 교수는 루터가 없었더라도 종교개혁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보급으로 복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타나고, 기존질서와 교리적 진술은 충분히 거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적 분열이 진행되는 가운데 종교분열도 뒤따라 왔을 것이라고 말한다.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은 의미가 있었다고 김 교수는 말하는데, 복음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놓았으며, 근대문화를 여는 역사의 분수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 target=_blank>http://www.nah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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