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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분필 / 나희덕 시인 (1966-)현대시/한국시 2011. 12. 18. 13:49
거대한 분필 / 나희덕
분필은 잘 부러진다, 또는 잘 부서진다
청록의 칠판 위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파발마처럼 달리는
분필 한 자루
그것이 죽음의 소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너무 많은 분필을 낭비했다
죽은 이들의 잿가루를 모아서 만든
거대한 분필*,
사람의 키보다 훨씬 큰 분필 앞에 서 있는데
갑자기 환청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분필 속에 뒤엉켜 있는 목소리들
그 후로 칠판에 분필을 대면
어떤 목소리가 끼어들고
어떤 손이 완강하게 가로막고
어떤 손이 낯선 분절음을 휘갈기게 한다
선생 노릇 십여 년,
화장火葬을 치르고 난 사람처럼
손가락에 묻은 분필 가루를 씻어내는 동안
나는 하루하루 조개에 가까워져 간다
분필은 잘 부서진다, 또는 부서져 쌓인다
칠판 위에 곧 스러질 궤적을 그리며
* 쑨 위엔과 펑유, <하나 또는 모두>, 2004년 광주비엔날레전'현대시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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