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시창작 관련

[스크랩] 최종천 시인이 보내주신 글

밝은하늘孤舟獨釣 2012. 3. 22. 23:55

보낸날짜
2009년 11월 30일 월요일, 오후 22시 39분 17초 +0900
제목
응교형께 최종천

받는이 "제비꽃사랑" <eungsil@hanmail.net> 추가
보낸날짜 2009년 11월 30일 월요일, 오후 22시 39분 17초 +0900
제목 응교형께 최종천 
 
 제 시를 연구하신다는 분들께 이 글을 읽게 해 주세요

제 의식세계를 알 것입니다.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시 일본에 안 가시는지

안가요?

수요일 통화하지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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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題意識의 시와 美意識의 시

   

    솔직히 말해서 한국시를 읽는 것은 위에 조금은 부담이 가는 일이다. 그 많고 많은  시편들이 관념의 추구로서 주제의식의 시라는 사실은, 시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虛構이며 추상적 구조물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과 관련되어있을 것이다. 우리 한국의 시인들은 시를 쓸 때 자기가 다루는 대상이 언어가 아니라 언어라는 기호가 담고 있는 관념이다. 관념안에 갇혀서 관념의 밖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주제의식의 이 관념을 실재 혹은 사실로 착각한다. 예를 들어 어느 시인이 생명의 시를 쓴다고 할 경우에 그는 자신이 생명의 시를 씀으로 하여 생명이 더욱 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생명을 위해서라면 시를 쓰지 않는 것이 더 좋다. 시는 어디까지나 언어의 것이다.

    대한민국은 관념의 재국이다. 시가 이렇게 쓰여 진다는 사실은 국회 등의 정부 기관에서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처음엔 문제를 가지고 논하다가 곧장 감정싸움으로 되어 사건의 본질을 망각하는 것과 무관하지가 않다. 사건의 이치를 파고들어 이해하고 해석하는 논리가 없기 때문이다. 시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문제는 목적(주제)이 아니라 방법의 문제인 것이다. 주제는 이미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관념으로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다. 주제는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발전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는 달라지거나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의자를 만들려고 목제를 준비하여 착수한다. 그리고 의자를 염두에 두고 만든다. 이 경우에 의자를 만든다고 하면서 책상을 만드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의자와 책상이 다른 것이어서가 아니라, 몸을 가지고 있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한다고 하면서 증오를 하기는 매우 쉽다. 왜인가 하면, 사랑이나 증오는 몸이 없는 추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에게 구원이 불가능한 이유이다. 동시에 이것이 예술이라는 추상적 구조물이 해도 해도 시행착오이며 완성이 불가능한 이유이다. 이 엄연한 사실을 응시한다면 우리는 차라리 주제에 매달리는 것보다 미의식을 통하여 이러한 인간존재의 모순을 분명하게 목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만이 하는 예술에 완성이 없다는 것과 인간에게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 시가 허구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을 결국 인간에게 구원이 가능하며 사랑이 더구나 예술이, 그 외 인간이 목적으로 추구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드물게나마 미의식을 추구하는 시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다음의 시는 그 시작부터가 분명하게 미의식을 좇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나이의 팔이 달아나고 한 마리 흰 닭이 구 구 구 잃어버린 목을 좇아 달린다. 오 나를 부르는 깊은 명령의 겨울 지하실에선 더욱 진지하기 위하여 등불을 켜 놓고 우린 생각의 따스한 닭들을 키운다. 닭들을 키운다. 새벽마다 쓰라리게 정신의 땅을 판다. 완강한 시간의 사슬이 끊어진 새벽 문지방에서 소리들은 피를 흘린다. 그리고 그것은 하얀 액체로 변하더니 이윽고 목이 없는 한 마리 흰 닭이 되어 저렇게 많은 햇빛 속을 뒤우뚱거리며 뛰기 시작한다. 

- 사물 A . 이승훈-

 

    모가지가 칼에 절단 나고서도 그 목을 찾아 마당을 도는 한 마리의 닭, 이 닭은 기어코 달아 난 자신의 목을 찾아 자신을 회복하겠다는 것인가? 그토록 끈질긴 생명을 우리는 키우는 것이다. 그것도 밤에만, 이 시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인간의 리얼한 비참함 같은 것이다.
    이 시가 다루고 있는 구체적인 것은 인간의 성욕일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 중에서 가장 진지한 것이 곧 섹스이다. 그것은 정신의 땅을 파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은 섹스를 육체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정신적인 하나의 작업으로 보고 있는 듯 하다.
이런 시를 주제의식의 시로 읽을 때 그 주제는 분명하지가 않다. 다만 섬찟한 기분이 들 것이다. 그리고 긴장하게 된다. 그것으로 족하다. 이 승훈 시인의 다른 시,

 
램프가 꺼진다. 소멸의 그 깊은 난간으로 나를 데려가다오.
장송의 바다에는 흔들리는 달빛, 흔들리는 달빛의 망토가 펄럭
이고 나의 얼굴은 무수한 어둠의 칼날에 찔리우며 사라지는 불빛
따라 달린다. 오 집념의 머리칼을 뜯고 보라, 저 침착했던 의의가
가늘게 전율하면서 신뢰의 차건 손을 잡는다. 그리고 시방 당신이
펴는 식탁위의 보자기엔 아마 파헤쳐진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쓰러질 것이다.
                                                            -위독 제 1호-

    

   이러한 시들을 주제의식으로 읽게 되면 무슨 의미를, 무슨 주제를 말하고 있는가 의문스럽고 난해하게 된다. 주제의식으로 이런 시를 읽으면 관념적인 시가 된다. 그렇다. 이런 시들은 관념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관념을 다루되 그 관념에 상응하는 구체적인 풍경들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런 시들을 쓰는 경우 시인들이 추구하는 것은 어떠한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미의식이다. 아름다움이란 그토록 처절한 것이다. 니힐이 왜 생기겠는가? 우리가 인생을, 우리 자신을 믿기 때문이다. 이런 시에는 니힐이 있으면 있지 모럴 따위는 없다.

    아직도 주제의식의 시만을 고집하고 있는 한국의 시와는 다르게 이웃 나라 일본에는 벌써부터 미의식을 추구하는 시가 만발해 있었다. 이런 사정은 의식구조랄까 생각과 근성이 그들과 우리 한국인이 얼마나 다른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일본인을 상대하다 보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깔끔하고 세련된 에티켓을 보게 된다. 일본의 식당들은 종업원이 많아야 넷 다섯명인 식당이 무수하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얀 위생복과 위생모자를 쓰고 있다. 우리 한국에 있는 식당들을 보라. 아마 위생복과 위생모자를 착용하고 있는 경우를 드물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데서 그들의 철저한 프로근성을 본다. 우리에게는 없는 프로근성이 일본인에게는 무장되어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경계해야하는 것들인데, 시도 그렇게 읽히는 것이다.


 

한편의 시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
숱한 것을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
숱한 사랑하는 것을 사살하고 암살하고 독살해야 한다

 

보라,
사천의 날과 밤 하늘에서
한 마리 새의 떨리는 혀가 탐나서
사천의 밤의 침묵과 사천의 날의 逆光線을
우리들은 사살했다.

 

들으라,
비 내리는 모든 도시, 용광로,
한 여름의 방파제와 炭坑에서
굶주린 한 아이의 눈물이 있어서
사천의 날의 사랑과 사천의 밤의 연민을
우리들은 암살했다.

 

기억하라,
우리들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을 보고,
우리들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한 마리의 들개의 공포가 탐나서,
사천의 밤의 상상력과 사천의 날의 차거운 기억을
우리들은 독살했다.

 

한편의 시를 낳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그리운 것을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死者를 소생시키는 오직 하나의 길이다
우리들은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안된다

                                     - 四千의 날과 밤 , 다무라 류이치-

 

    인간에 대하여 이렇게나 혹독하게 비평하는 시가 달리 가능할까 싶다. 인간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잃어가는 인간성과 사라져 가는 사물들을 통하여 인간의 운명을 자각하는 시다. 떨리는 새의 혀, 굶주린 아이의 눈물, 한 마리 들개의 공포를 우리들은 탐한다. 그러한 언어와 그러한 감정과 그러한 감각을 우리들은 가지고 싶은 것이다. 그 대가로 우리들은 사랑하는 것들을 죽여야 한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우리들은 그 길을 갈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한 편의 시를 위해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죽여야 한다면 시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개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시를 가지고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도 내포 되어있는 것이다. 떨리는 새의 혀, 아이의 눈물, 들개의 공포는 세 겹 네 겹으로 된 은유이다. 이러한 처절한 인간의 모순을 언어를 통하여 자각하면서 느끼는 어떠한 감각이나 사유들 그것들이 미의식이다. “이것은 死者를 소생시키는 오직 하나의 길이다.” 이토록 끈질기게 그는 죽음의 논증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건대 인간인 우리가 제대로 이루어 내는 것이 죽음 외에 다른 것이 있는가? 그런데 그 죽음마저도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렸다. 시인은 시를 통하여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읽는다면 이 시는 죽을 수 없는 세계를 역설적인 논리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의식적이며 동시에 관념적이며 논증적인 시이다. 예술은 개인이 죽음을 거부하는 몸짓이기도 한 것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죽음의 논증을 구하는 중이다. 그러나 단 한사람도 죽음을 목격한자는 없다. 마침내 인간은 허깨비에 불과하며 현실이란 이런 것의 최대공약수인지도 모른다 인간을 대신하여 반대로 온 사물이 묻기 시작한다. 삶에 대하여 그 존재에 대하여 그것이 한 개의 의자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실이란 이런 것의 최소공약수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간의 운명에 우수를 느끼지 못하는 자가 어찌 이 난세에 목숨을 걸 수 있겠는가. 때로 천재도 나타났지만 허무를 한결 정교하고 치밀하게 했을 뿐이다. 자명한 것도 백주의 소용돌이를 깊게 했을 뿐이다.

 

그는 무엇인가를 말하여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사실에 대하여서만 써 두리라 애초에 무릎부터 꺽어지듯 그는 땅에 꺼꾸러졌다 달려 온 사람들 속에서 마침 내 또레의 청년이 불쑥 이렇게 중얼거렸다 “ 아름다운 얼굴이야 참 안 됐군 세상을 꽃같이 믿고 있으니!”
                                               -가라 앉은 절, 다무라 류이치-

  

   사실 우리는 주검을 목격했지만 죽음 그 자체를 목격할 수는 없다. 죽임이 사람도 물건도 아닌 이상 인간이 어떻게 그 모습을 볼 수 있겠는가?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인간이 죽음을 거부하고 부인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죽음이 불가능하니 인간은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죽지만 허깨비는 죽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식물인간의 경우 죽음이 애매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시는 인간이 죽음을 애매모호하게 만든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래서 사물들이 인간을 대신하여 묻고 있는 것이다. 사물로서 의자는 추상적이거나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다.

     2연은 시치미를 떼고 말하고 있다. 1연과 2연 사이에는 커다란 공백이 존재하고 있고 어쩌면 이 시는 이 공백을 통하여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다무라 류이치를 읽고 모작을 쓴 바 있다.

 

인간의 영혼이란 허깨비보다 모호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겐 그것이 나쁜 것일지라도 확실한 것에 매달리는 습관이 있다 고로, 허깨비에 대하여 탐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인간은 죽어도 죽은 사람의 허깨비는 남는다는 엄연함, 각자는 각자의 허깨비를 세우는데 최선을 다 한다 후곤들은 허깨비에 대하여 연구하고 허깨비를 양육한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유산이므로 나는 사랑은 영원하다는 말로 나의 허깨비를 세우기로 했다, 그것으로 부족하다면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을 보충한다 나의 허깨비는 이제 완벽하다 돈 보다 음식보다 더 믿을 만한 것이 되리라, 피가 되고 살이 되리라 허깨비가 싫다면 영혼이라고 해 둘 일이다 우리의 얇은 귀에는 관념이라고 하면 자존심 상하고 영혼이라고 하면 고상하게 들린다, 사랑과 행복과 무관하게 영혼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당신도 알 것이다 영혼을 우리는 어떻게 거래하고 있는가? 빵은 필요하지 않은가? 굶주릴 때는 아무도 영혼에 대하여 배려하지 않는다, 부유해지고 나면 비로소 영혼을 들먹이게 된다, 영혼을 위해 모든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허깨비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허깨비 만세! 우리는 무한의 상속자다! 딛고 있는 대지보다는 푸르른 하늘보다는 허깨비를 믿는다
                                                      -허깨비를 세우다, 최 종천-

 

   이  시를 나는 어떤 관념이나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쓴 것이 전혀 아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우리 자신과 사랑, 인간이 사랑을 알기나 한가?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아는 채, 사랑이 없기 때문에 있는 채 하는 것이다. 그런 따위의 인간을 풍자하고 해학하고 조롱하고 야유하면서 느끼는 통쾌함! 그것을 위해 쓴 것이다. 이 시에 그러한 주제는 없다, 다만 꼬이고 부딪치고 작열하고 뒤틀리는 언어만 난무 한다.

 

지하철 역에서였다. 나는 처음 여자가 남자의 性器에 대하여 批評하는 말을
들었다. 저, 좆같은 게 다 육갑을 떨어! 내가 경악한 것은 여성들도 보지 같
다고 하는 게 아니라 좆같다고 한다는 것이다. 여아보다 남아의 탄생이 더
많고 성비가 안 맞아 장가를 못 가는 총각들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한 때
남성의 거기를 청와대라고 표현했었다. 박정희 시절이다.  시월 유신과 인혁
당 조작까지 그는 얼마나 육갑을 떨었던 것이냐. 그러므로 여자들의 좆같다는
욕은 욕이 아니고 이데올로기에 대한 야유이거나 풍자다. 따지고 포면 전쟁의
발원지는 발기상태의 對空포다. 그렇게 발사를 해도 염치도 체면도 없이 꼿꼿
한 저 이데올로기를 시들게 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금
은 여성상위시대이다. 그럼에도 거의 모든 여성들이 좆같애 라고 한다. 아무렴
자궁이 이데올로기가 되어서야! 태초의 사회는 母系사회였다. 그 때는 이데올
로기가 없었다. 세상은 좆같은 것 천지다. 이 새 천년에 제발 보지같은 것들이
많기를! 두리둥실 둥근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흐물흐물한 물신들에게
받들어 좆!
            _이데올로기 槪論! 최 종천-.

 

     이 시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이런 시를 읽으면서 주제를 찾으려 할 것인가? 이런 시를 읽고 당신이 통쾌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언어이며 언어는 관념의 기호이다. 즉 언어는 어디까지나 허구인 것이다. 허구이기 때문에 무한이 다시 반복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러면서 즐길 수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완성이 필요하지도 않다. 대문에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하지가 않다. 당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우리가 사랑으로 즐길 수 있는가를, 우리가 행복으로 즐길 수 있는가를! 우리가 평화를 즐길 수 있는가를! 우리는 그것들을 즐길 수가 없고 따라서 우리는 그것들에 몰두할 수가 없게 되어있는 것이다. 인간은 행복을, 사랑을, 평화를 견디지 못한다. 우리는 고통마저도 즐길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시가 언어로 된 추상적 허구의 구조물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써지는 수많은 시들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건 좀 우스운 일이다.

출처 : 시냇가에 심은 나무 : 재민 재혁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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