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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燈)에 부침 / 장석주 (1954-)
    현대시/한국시 2009. 5. 11. 13:38

    등(燈)에 부침 / 장석주 (1954- )


    1

    누이여, 오늘은 왼종일 바람이 불고

    사람이 그리운 나는 짐승처럼 사납게 울고 싶었다.

    벌써 빈 마당엔 낙엽이 쌓이고

    빗발들은 가랑잎 위를 건너 뛰어다니고

    나는 머리칼이 젖은 채

    밤 늦게까지 편지를 썼다.

    자정 지나 빗발은 흰 눈송이로 변하여

    나방이처럼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유리창에 와 흰 이마를 부딪치곤 했다.

    나는 편지를 마저 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엎드려 혼자 울었다.


    2

    눈물 글썽이는 누이여

    쓸쓸한 저녁이면 燈을 켜자.

    저 고운 불의 모세관 일제히 터져

    차고 매끄러운 유리의 內壁에

    밝고 선명하게 번져나가는 鮮血의 빛.

    바람 비껴불 때마다

    흔들리던 숲도 눈보라 속에 지워져 가고,

    조용히 燈의 심지를 돋우면

    밤의 깊은 어둠 한 곳을 하얗게 밝히며

    홀로 근심없이 타오르는 신뢰의 하얀 불꽃.

    燈이 하나의 우주를 밝히고 있을 때

    어둠은 또 하나의 우주를 덮고 있다.

    슬퍼 말아라, 나의 누이여

    많은 소유는 근심을 더하고

    늘 배부른 자는 남의 아픔을 모르는 법,

    어디 있는가, 가난한 나의 누이여

    燈은 헐벗고 굶주린 자의 自由

    燈 밑에서 신뢰는 따뜻하고 마음은 넉넉한 법,

    돌아와 쓸쓸한 저녁이면 燈을 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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