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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1901-1943)
    현대시/한국시 2009. 5. 15. 10:17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1901-1943)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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