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압록강 / 고은 (1933-)현대시/한국시 2009. 6. 12. 23:21
압록강 / 고은 (1933- )
오래 전 젊은날
아무것도 없이 하루가 공짜로 가던 시절이었다
나는 다친 다리로 걷지 못하는 날
그 빈집 곰팡이와 함께
하루를 다 보내며
압록강 같은 서사시를 쓰고 싶었다
조선이 일본에게 다 짓밟혔을 때도
압록강은 흘러갔다
조선을 넘어 만주가 짓밟힐 때도
압록강은 흘러갔다
흘러 흘러
바다를 만들어주고
미련없이 자신은 사라지는 강물이고 싶었다
그 강물의 서사시가 되고 싶었다
그 길고 긴 강 기슭 어디에
아름다운 곳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더러는 험악하고
더러는 삭막하고
더러는 무덤덤한 풍경이건만
그 나날의 밤낮으로
온갖 일 다 겪으며 흐르는 그것
온갖 생각 다 실어 흐르는 그것
그렇지 않을손가
미인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란
얼마나 생지옥인가
그것이 아닌
그것이 아닌
압록강의 길고 긴 물 기슭은
항상 고단한 삶이 있고
억울한 죽음들이 있다
그런 강의 서사시가 되고 싶었다
나뿐 아니라
이미 나보다 먼저
압록강은 흐른다 아아 하고 누가 노래하였다
그의 머리말을 뒤어 내가
압록강 같은 서사시를 쓰고 싶었다
'현대시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틈새 사이로 / 박광옥 (0) 2009.06.13 태양계 / 이문재 (1959-) (0) 2009.06.13 미꾸라지 / 박노영 (0) 2009.06.11 화살 / 고은 (1933-) (0) 2009.06.10 ‘뭘 써요? 뭘 쓰라고요?’ / 덕치초 3년 문성민 (0) 2009.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