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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다리에 대하여 - 송경동 시인
    현대시/한국시 2023. 11. 14. 12:14

    아래의 시는 노동자 시인 송경동의 시이다.

     

    사다리에 대하여 - 송경동 시인(1967- )

     

    살면서 참 많은 사다리를 올라보았다

    어려선 주로 나무 사다리였다

    생선 궤짝에서 뜯어낸 썩은 널빤지로 만든 사다리

    써금써금 한두칸이 푹푹 주저앉던 사다리

    가끔 산에서 쪄온 옹이 진 나무들로 만든

    삐뚤빼뚤 운치 나던 사다리

     

    아시바를 잘라 용접으로 붙여 만든 사다리

    오래되면 용접 부위가 떨어져 위험하던 사다리

    쇠파이프에 목재를 대 목기시대와

    철기시대가 어색하게 만나던 사다리

    아무리 굵은 철사로 묶어놓아도

    금세 능청맞게도 칸칸 간격이 달라지던 사다리

    큰 공장 굴뚝에 아예 붙어 있던 사다리

    겨울이 되면 손이 쩍쩍 달라붙던 사다리

    허공에 철길처럼 평형으로 위태롭게 놓여 있어

    매번 목숨을 내놓고 달달 떨며 건너야 하던 사다리

    곰빵을 메고 올라야 하던 사다리

    질통을 메고 울라야 하던 사다리

    배관을 놓기 위해 올라야 하던 사다리

    닥트를 하기 위해 올라야 하던 사다리

    텐조를 하기 위해 올라야 하던 사다리

    설비를 하기 위해 올라야 하던 사다리

     

    구로공단 닭장촌에 있던 사다리

    폭이 어깨너비도 안되는 직각 사다리를 타고

    네모난 구멍 속으로 올라야 하던 판잣집 이층

    그 방에서 다시 다락으로 오르던 사다리

    닭장집 지붕마다 만들어놓은

    스티로폼 상추밭 궤짝 고추밭 깨진 다라이 토마토밭으로 오르기 위해

    집집마다 보초처럼 기대어놓던 사다리

    어떤 건 늘씬하고 어떤 건 땅딸하던

    제각각의 사다리

    한순간에 와하며

    공장 담벼락을 넘던 철 사다리

    CC카메라탑 위 조그만 둥지로

    구리스가 칠해진 한강다리 난간으로

    까마득한 송전탑 위로

    현란한 빛 쇼가 펼쳐지는 광고탑 위로

    망루로 차벽 위로 기어오르던 필사의 사다리

    그 아래에서 어디론가

    까마득히 떨어지던 마음들

     

    어디쯤 바늘구멍만큼 있다는

    계급 상승의 사다리를 타보고 싶기도 했지만

    이젠 모두 지난 일

    우린 언제쯤 별을 더 잘 보기 위한

    따사로운 햇볕에 좀더 가까이 가기 위한

    예쁜 집을 손수 짓기 위한
    탐스러운 감과 사과와 배를 따기 위한

    맨 위 칸의 책을 꺼내기 위한

    지붕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작은 고양이를 위한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한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그런 아름다운 사다리를 가져볼 수 있을까

     

    창비시선 394, 2016년 출판, 송경동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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