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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修養)대군 – 천양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16. 11:48
수양(修養)대군 – 천양희 시인
수양대군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다
그는 웃음을 몰고 다닌다
바람을 일으키며
한바탕 몰려오는 그는
유독 분노를 분뇨라 하고
인품을 인분이라 발음한다
공분할 일이 생기면
분뇨의 폭발이 일어날 것 같다고 하고
인품 없는 사람을 보면
인분 냄새가 등천할 것 같다고 한다
말과 깊이 내통한 그를 보고
내심 반가웠다
그의 말이 웃음처럼 번지면
감동 없는 날을 베고 싶은 적도 있다
그는 뭉텅뭉텅 말이나 던져주면서
막힌 구멍을 숭숭 뚫어주지만
누가 똥을 싸줄 수 없듯이
누가 대신 화를 풀어주긴 어렵다고 능청을 떤다
인분이 퇴비의 재료가 되듯이
건강한 분노는 인품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아무 데서나 분노를 표시하는 건
공공장소에서 분뇨를 투척하는 일이라고
마음속에 분노가 쌓이면
그 인생은 한마디로 똥통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이 나를 환하게(화나게) 만들곤 한다
그는 가히
나를 수양시키는 수양대군이시다
천양희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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