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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겨울 초대장 – 신달자 시인(1943-)현대시/한국시 2024. 1. 8. 23:40
겨울 초대장 – 신달자 시인
당신을 초대한다.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당신. 그 빛나는 눈으로 인생을 사랑하는 당신을 초대한다. 보잘 것 없는 것을 아끼고 자신의 일에 땀 흘리는, 열심히 쉬지 않는 당신의 선량한 자각을 초대한다.
행복한 당신을 초대한다. 가진 것이 부족하고 편안한 잠자리가 없어도 응분의 대우로 자신의 삶을 신뢰하는 행복한 당신을 기꺼이 초대한다.
눈물짓는 당신. 어둡게 가라앉아 우수에만 찬 그대 또한 나는 초대한다. 몇 번이고 절망하고 몇 번이고 사람 때문에 피 흘린 당신을 감히 나는 당신을 초대하려 한다. 출발을 앞에 둔 자. 어제까지의 시간을 용서받고 새로운 시작에 발을 떼어놓는 당신을 나는 빼어 놓을 수 없다.
사랑을 하는 사람, 그 때문에 잠을 설치는 사람. 신의 허락으로 일생에 한 번 얻은 숙명인 그 사랑으로 내밀한 아픔을 품은 당신을 초대한다.
아기를 가진 사람, 그래서 처음으로 모성에 눈뜨는 사람. 아! 여자임을 경이롭게 확인하는 당신. 당신을 초대한다.
시험을 끝내고 갑자기 공허해진 젊은이. 첫눈을 기다리는 설레는 가슴, 더운 가슴을 지닌 겨울의 젊은 여자를 나는 부른다.
고독한 사람. 사람에 지쳐서도 끝내 사람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당신. 흔하고 흔한 그 고독이 실로 자신에게 당도했을 때, 놀라며 이를 깨무는 춥고 추운 당신을 나는 초대한다.
배고픈 사람. 언제나 허기져서 한 끼도 먹어보지 못한 영혼을 지닌 당신. 그릇을 비워도 정녕 그 허기를 면치 못하는 당신의 당황과 스스로의 채찍을 함께 초대한다.
나는 초대한다. 누구라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하늘아래 모든 사람을. 겨울 자정. 홀로 식탁에 앉아 당신들을 부른다. 내가 마시는 더운 차 한 잔. 나는 이것을 나누어 먹고 싶다. 이 시간에 그 무엇도 소중할 수 없다. 아무 것에도 하나의 의미가 되어질 수 없으면서 그 하나의 의미가 되고자 나는 식은 차를 마신다. 한 모금 한 모금, 식은 차를 마실 때 내가 초대한 사람들이 하나씩 당도한다. 마침내 식탁은 융성한 대화가 이루어지려 한다. 사랑하는 저들은 나의 식구이다. 저마다 나와 같은 아픔을 앓는 친구들이다. 저마다 저들은 바로 내 육신의 분신들이다. 결국 나는 나를 초대한 것이다. 결국 한 잔의 식은 차를 마신 건 나 혼자뿐이었다. 이 무서운 자각.
당신을 초대한다.
겨울 새벽. 발이어는 추위를 견디며 새벽 미사에 참례하는 사람. 마리아 상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는 당신을 나는 기다린다. 가득 차 있는 듯 했으나 불시에 그 의자들은 비어있다. 그래서 또 나는 당신을 초대한다. 꿈꾸는 사람. 어느 날엔 이상이 현실에도 가능하리란 믿음으로 밤마다 꿈의 잔치를 여는 사람, 사람을 비켜서는 사람, 사람으로 오는 허무를 빠르게 체험하여 사람에 대한 무섬증을 가진 사람, 진실로 사랑을 가지고 문을 두드려도 끝내 얼어붙은 마음을 풀지 못하는 슬픈 사람, 노력하면 그만치의 보수를 받는 것에 확고한 뿌리를 내린 눈과 가슴에 백 촉의 등을 켜고 열정으로 살아가는 사람, 날이 밝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 현실의 고통으로 정신이 병들어 지쳐서 기진한 사람, 당신들을 초대한다. 이미 한 잔의 식은 차도 없어지고 찬바람이 이는 빈 식탁 위에 당신들을 초대한다. 이 한기를 도저히 끌 수 없어 좌석이 없는 식탁 위에 당신을 오게 한다. 와서 만나는 그대들은 여지없이 낯이 익어 반갑게 손잡아 주면 저마다 그것들은 타인이 아니다. 내가 버린 나. 내가 놓친 나. 내가 사정없이 삶을 탕진했을 때 부서졌던 편편이 살아 돌아온 것이다. 이 무서운 재생.
결국 식탁의 의자는 비어 있는 채로다. 결국 나는 홀로 교회 종소리를 듣게 된다. 창을 흔드는 바람 소리, 개 짓는 소리, 새벽 네 시를 알리는 시계소리를 나는 혼자 듣고야 만다. 언제나 그랬었다. 오리라 했던 사람은 오지 않았었고 내 앞에 서있는 사람은 내가 부른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날마다 사람을 부른다. 겨울, 적막한 밤을 사랑으로 가득 채울 나와 같이 부족하고 추운 벗을 부른다. 언제나 불러도 아니 오는 사람을, 언제나 불러도 응답 없는 그 사람을, 나는 야생의 들짐승이 되어 안으로 안으로 울음을 꺽어 넣고 어둠 속에 웅크린다. 어둠은 좋은 질감의 의상이다. 부끄러운 곳을 가려주는 고마운 의상, 벗겨도 벗겨지지 않는 동정의 신천지이다.
나는 당신을 초대한다. 아픔으로 눈물을 흘려 본 당신을 초대하여 저 어둠의 동정을 깨뜨리고 싶다.
당신을 초대한다. 겨울 아침에......
오늘은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이런 겨울 아침에 나는 물을 끓인다. 당신을 위해서. 어둠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내 힘이 비록 약하여 거듭 절감했지만 언젠가 어둠은 거두어지게 된다. 밝은 빛나는 음악이 있는 곳에 당신을 초대한다. 가장 안락한 의자와 따뜻한 차와 그리고 음악과 내가 있다. 바로 당신은 다시 나이기를 바라며 어둠을 이기고 나온 나를 맨살로 품으리라.
지금은 아침, 눈이 내릴 것만 같은 이 겨울 아침에 나는 초인종 소리를 듣는다. 희열이 완만한 가슴의 소리, 마음의 소리, 바로 당신의 부름을 듣는다.
드디어 눈이 내린다. 눈송이는 큰 벚꽃 잎처럼 춤추며 내린다. 내 뜰 안에 가득히. 당신과 나 사이에 가득히, 온 누리에 가득히.
나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 부족하고 배고팠던 것, 추위로 발이 얼었던 일, 고독하여 살 저미던 일, 사랑 때문에 사람을 저주하던 일, 그 모두를 나는 용서한다. 그리고 나는 새롭게 창을 연다. 함박눈이 내리는 식탁 위에 뜨거운 차를 분배하고 당신이 누른 초인종 소리에 답을 한다.
어서 오세요. 이 겨울의 잔칫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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