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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우리가 지나온 길에 - 신경림 시인(1935-)현대시/한국시 2024. 1. 11. 21:35
우리가 지나온 길에 - 신경림 시인
불기없는 판자 강의실에서는
교수님의 말씀보다
뒷산 솔바람 소리가 더 잘 들렸다
을지로 사가를 지나는 전차 소리는
얼음이 깨지는 소리처럼 차고
서울에서도 겨울이 가장 빠른 교정에는
낙엽보다 싸락눈이 먼저 와 깔렸다
그래도 우리가 춥고 괴롭지 않았던 것은
서로 몸을 녹이는
더운 체온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강당 앞 좁은 뜰에서
도서관 가파른 층계에서
교문을 오르는 돌 박힌 골목에서
부딪히고 감싸고 맞부비는
꿈이 있어서 다툼이 있어서 응어리가 있어서
겨울은 해마다 포곤했고
새해는 잘 트인 큰길처럼 환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지나온 길에
붉고 빛나는 꽃들이 핀 것을 본다
우리들 꿈과 다툼과 응어리가
부딪히고 감싸고 맞부비는 속엣
화려하게 피워놓은 꽃들을 본다
- 신경림 시집 <가난한 사랑노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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