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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우리는 너무 멀리까지 왔다 - 신경림 시인(1935-)현대시/한국시 2024. 1. 11. 22:17
우리는 너무 멀리까지 왔다 - 신경림 시인
우리는 너무 멀리까지 왔다
내 것은 버려두고 남의 것을 쫓아
허둥대며 비틀대며 너무 멀리까지 왔다
색다른 향내에 취해 속삭임에 넋나가
이 길이 우리가 주인으로 사는 대신
머슴으로 종으로 사는 길임을 모르고
우리는 너무 멀리까지 왔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소경이 되었다
앞을 가로막은 천길 낭떠러지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었다
천지를 메운 죽음의 소리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바보가 되었다
남의 것을 쫓아 허둥대는 사이
우리 몸은 서서히 쇠사슬로 묶였지만
어떤 데는 굳고 어떤 데는 썩었지만
우리는 그것도 모르는 천치가 되었다
문득 서서 귀를 기울여보면
눈을 떠라 외쳐대는 아우성 그 소리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동은 터오는데 새벽 햇살은 빛나는데
그릇된 길잡이한테 휘둘리며
우리는 너무 멀리까지 왔다
이제는 풀잎의 이슬로 눈을 비벼 뜰 때
샘물 한 바가지 퍼마시고
크게 소리내어 울음 울 때
허둥대던 발길 우리 것 찾아 돌릴 때
머슴으로 종으로 사는 길을 버리고
우리가 주인 되어 사는 길 찾아들 때
우리는 너무 멀리까지 왔다
이제는 얼뜬 길잡이 밀어 제치고
우리가 앞장서서 나아갈 때
- 신경림 시집 <가난한 사랑노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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