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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 신현림 (1961-)현대시/한국시 2009. 8. 12. 14:19
창 / 신현림 (1961-)
<세기말 블루스> (창비 1996) 중에서
마음이 다 드러나는 옷을 입고 걷는다
숨어 있던 오래된 허물이 벗겨진다
내 허물은 얼마나 돼지처럼 뚱뚱했던가
난 그걸 인정한다
내 청춘 꿈과 죄밖에 걸칠 게 없었음을
어리석음과 성급함의 격정과 내 생애를
낡은 구두처럼 까맣게 마르게 한 결점들을
오래도록 괴로워했다
나의 등잔이 타인을 못 비춘 한시절을
백수일 때 서점에서 책을 그냥 들고 나온 일이나
남의 애인 넘본 일이나
어머니께 대들고 싸워 울게 한 일이나
실컷 매맞고 화난 주먹으로 유리창을 부순 일이나
내게 잘못한 세 명 따귀 때린 일과 나를 아프게 한 자
마음으로라도 수십번 처형한 일들을
나는 돌이켜본다 TV 볼륨을 크게 틀던
아래층에 폭탄을 던지고 싶던 때와
돈 때문에 조바심치며 은행을 털고 싶던 때를
정욕에 불타는 내 안의 여자가
거리의 슬프고 멋진 사내를 데려와 잠자는 상상과
징그러운 세상에 불지르고 싶던 마음을 부끄러워한다
거미줄 치듯 얽어온 허물과 욕망을 생각한다
예전만큼 반성의 사냥개에 쫓기지도 않고
가슴은 죄의식의 투견장도 못 된다
인간은 원래 그런 것이라며 변명의 한숨을 토하고
욕망의 흔적을 버린 옷가지처럼 바라볼 뿐이다
고해함으로써 허물이 씻긴다 믿고 싶다
고해함으로써 괴로움을 가볍게 하고 싶다
사랑으로 뜨거운 그 분의 발자국이
내 진창길과 자주 무감각해지는 가슴을 쾅쾅 치도록
나는 좀더 희망한다
그 발자국이 들꽃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나
나를 깨워 울게 하도록
<저자 소개>
1961 경기 의왕 출생. 아주대 국문과 졸업.
1990 『현대시학』에 「초록말을 타고 문득」외 9편을 발표하면서 등단.
1994 첫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간행.
신현림 시인은 "애정당 당수" 이숙영 아나의 책을 보다가 알게 된 시인이다. 신 시인은 국문과를 나오고 시를 쓰지만 한 때 미술학도였다. 그리고 시도 쓰지만 사진도 찍는다고 한다. 이 시를 통해 나는 그녀의 고백성사를 듣는다. 자기의 잘못을 이렇게 열거하는 것도 훌륭한 시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짜피 시란 고정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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