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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시)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 나태주 시인(1945~)현대시/한국시 2017. 8. 5. 21:05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 나태주 시인(1945~)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하나님!
저에게가 아니에요.
저의 아내 되는 여자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는 말씀이어요.
이 여자는 젊어서부터 병과 함께 약과 함께 산 여자에요.
세상에 대한 꿈도 없고 그 어떤 사람보다도 죄를 안 만든 여자예요.
신발장에 구두도 많지 않은 여자구요.
한 남자 아내로서 그림자로 살았고
두 아이 엄마로서 울면서 기도하는 능력밖엔 없었던 여자이지요.
자기의 이름으로 꽃밭 한 평 채전밭 한 뙈기 가지지 않은 여자예요.
남편되는 사람이 운전조차 할 줄 모르고 쑥맥이라서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닌 여자예요.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가난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저의 아내 되는 사람에게 너무 섭섭하게 하지 마시어요!
계간 <시와 시학> 2007년 가을호
나태주 시인의 아내의 화답시
너무 고마워요, 남편의 병상 밑에서 잠을 청하며
사랑의 낮은 자리를 깨우쳐주신 하나님!
이제는 저이를 다시는 아프게 하지 마시어요.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죄로 한 번의 고통이 더 남아 있다면,
그게 피할 수 없는 우리의 것이라면, 이제는 제가 병상에 누울게요.
하나님! 저 남자는 젊어서부터 분필과 함께,
몽당 연필과 함께 산, 시골 초등학교 선생이었어요.
시에 대한 꿈 하나만으로 염소와 노을과 풀꽃만 욕심 내온 남자예요.
시 외의 것으로는 화를 내지 않은 사람이에요.
책꽂이에 경영이니 주식이니 돈버는 책은 하나도 없는 남자고요.
제일 아끼는 거라곤 제자가 선물한 만년필과
그간 받은 편지들과 외갓집에 대한 추억뿐이에요.
한 여자 남편으로 토방처럼 배고프게 살아왔고,
두 아이 아빠로서 우는 모습 숨기는 능력밖에 없었던 남자지요.
공주 금강의 아름다운 물결과 금학동 뒷산의 푸른 그늘만이 재산인 사람이에요.
하나님! 저의 남편 나태주 시인에게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좀만 시간을 더 주시면 아름다운 시로 당신 사랑을 꼭 갚을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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