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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오늘(부활 제2주간 금요일) 독서와 복음에 대한 묵상

밝은하늘孤舟獨釣 2023. 4. 21. 23:46

오늘(부활 제2주간 금요일) 독서와 복음에 대한 묵상:

 

1독서(사도 5,34-42)

복음(요한 6,1-15)

 

   오늘 독서에 대해서. 짧은 생각을 나누면 이렇다.

   온 백성에게 존경받는 율법 교사인 바라사이 가말리엘은 예수의 제자도 아니고, 예수의 지인도 아니었지만, 그는 말썽을 부리는 예수의 제자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말했다. 인간적 기원 human origin은 결국 멸망하지만, 신적 기원(divine origin)은 멸망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은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쐐기를 박는다.

   제자들의 활동은 인간적 원인에서 온 것인가 아니면 신적 원인에서 온 것인가? 이런 질문은 우리에게도 해당이 된다. 우리의 활동은, 우리의 움직임은 신적인 기원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인간적 기원에서 비롯된 것인가? 한번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신적인 것은 좋은 것이고 인간적인 것은 안 좋은 것이라 단정할 필요는 없다. 인간적인 것에도 좋은 것이 숨어 있고 신적인 것에도 안 좋은 것이 숨어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중요한 것은 행위의 동기가 어떤가 일 것이다.

   가말리엘은 예수님의 제자, 예수님의 지인이 아니지만,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이는 꼭 신앙인이 아니어도 신앙에 대해 정통할 수 있다는 얘기, 비신앙인이어도 영성에 깊이가 있을 수 있다는 얘기이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 신앙인은 비신앙인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사제는 수도자는 평신도는 비신앙인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 복음에 대해서. 짧은 생각을 나누면 이렇다.

   첫째,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제자를 시험하신다. 영어로 시험하다는 put someone to the test라고 한다. 직역하면, 어떤 사람을 테스트에 둔다는 뜻이다. 테스트라는 말은 명사로 시험, 테스트, 검사란 뜻이 있고, 동사로는 시험하다, 테스트하다, 검사하다는 뜻이 있다. 예수님은 때때로 제자를 시험하신다. 이 말은 주님은, 하느님은 우리를 이렇게 이따금 테스트하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어떤 방식으로? 술로, 맛난 음식으로, 성욕으로, 명예욕으로, 시련으로, 스트레스로, 이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나는 어떤 테스트를 받는가?

   둘째, 본문에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나오는데, ‘물고기란 말보단 생선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밥상에 올라온 물고기를 우리는 보통 물고기라 칭하지 않고, ‘생선이라 하기 때문이다.

   셋째, 그건 그렇고 이 빵과 물고기를 가진 사람이 성인이 아니고 아이였다. 아이는 child라기 보단 minor 즉 미성년자라고 봐야 할 거 같다. 설마 초등학교 입학 전 아이에게 이런 음식들을 맡겼을까? 이보다는 큰아이에게 맡겼을 것이다. 아마 가족이나 일가친척들이 본문에 등장하는 이 아이에게 빵과 생선을 잠시 들고 있으라고 했던 것일지 모른다. 이 아이가, 다시 말해, 이 소년이 자신이 들고 있던 얼마 안 되는 빵과 생선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넘겼을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장정만 5천 명이 되는 식구, 그러니까, 5천 명 이상이 되는 그 자리에 모인 군중들에게 빵과 생선을 나눠주는 기적을 베푸신 것이다.

   이는 축구로 비유하자면, 득점에 대한 도움인 것이다. 득점에 대한 도움(assist)은 분명히 실제로도 공격 포인트로 계산된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에서 이 소년은 예수님의 기적 수행에서 실질적 도움을 준 것이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기적에는 미약한 한 소년의 도움을 발판으로 이뤄졌다는 얘기이다. 더 확장해서 말하면, 예수님께서 남의 도움 안 받고, 독자적으로 기적을 수행하실 수 있었지만,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퍼포먼스는 인간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뜻이다. 이는 또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의 행위는 잘 행해진다면, 주님의 활동, 혹은 기적이 이뤄지는 단초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우리의 사소한 행동도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겠다는 말이다. 결국 사소한 것이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