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시) 작은 것이 세상을 만든다 - 이기철 시인(1943-)

밝은하늘孤舟獨釣 2024. 4. 4. 22:21

시집을 읽다가 다시 주옥같은 시를 찾았다. 그래서 아래에 적어 본다. 아래의 시 중에서 밑줄친 부분이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구절이다. "봉투를 뜯기 전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사랑이다"

 

작은 것이 세상을 만든다 - 이기철 시인

 

종이 위에 볼펜 지나가는 소리로 세상을 들을 수 있다면

강가 모래알이 오늘은  얼마나 더 작아졌는지를 말할 수 있다

밥상 위에 수저 놓이는 소리로 세상을 들을 수 있다면

오늘 하루 물속의 돌멩이가 얼마나 냇물에 더 깎였는지를 말할 수 있다

한 잎을 지나 다른 잎으로 가는 애벌레의 발자욱으로 세상을 걸어갈 수 있다면

이 세상이 연필 글씨처럼 아늑함을 말할 수 있다

봉투를 뜯기 전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사랑이다

오늘 돋는 풀잎처럼 내일을 기다릴 수 있다면

아궁이에 사위어가는 재의 따스함을 말할 수 있다

세상을 만드는 작은 것들, 나비 날개소리 같은, 실바람 소리 같은,

제 살을 헐고 붉은 꽃을 내보내는 꽃나무 같은,

 

- 이기철 시집 <우리 집으로 건너온 장미꽃처럼 시가 이렇게 왔습니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