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시) 생은 과일처럼 익는다 – 이기철 시인(1943-)

밝은하늘孤舟獨釣 2024. 4. 4. 14:20

   이기철 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좋은 시 같아서 여기에 옮겨본다. 이 시는 다른 사람들과도 공유하고 싶은 시이다. 우리 인생을 참 아름답게 또한 통찰력 있게 표현한 시처럼 다가온다.

 

생은 과일처럼 익는다 이기철 시인(1943-)

 

창문을 누가 두드리는가, 과일 익는 저녁이여

향기는 둥치 안에 숨었다가 조금씩 우리의 코에 스민다

맨발로 밟으면 풀잎은 음악 소리를 낸다

사람 아니면 누구에게 그립다는 말을 전할까

저녁이 숨이 될 때 어둠 속에서 부르는 이름이

생의 이파리가 된다

불빛으로 남은 이름이 내 생의 핏줄이다

하루를 태우고 남은 빛이 별이 될 때

어둡지 않으려고 마을과 집들은 함께 모여 있다

어느 별에서 살다가 내게로 온 생이여

내 생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구나

나무가 팔을 벋어 다른 나무를 껴안듯

사람은 마음을 벋어 타인을 껴안는다

어느 가슴이 그립다는 말을 발명했으까

공중에도 푸른 하루가 살듯이

내 시에는 사람의 이름이 살고 있다

붉은 옷 한 벌 해지면 떠나갈 꽃들처럼

그렇게는 내게 온 생을 떠나보낼 수 없다

귀빈이여, 생이라는 새 이파리여

네가 있어 생은 과일처럼 익는다

 

감상

   사과나무는 제 먹을 것도 아니면서 가을이면 백 개 혹은 이백 개의 사과를 답니다. 팔이 부러질지도 모르면서 알알마다 향기를 불어넣습니다. 풀들은 제 몸을 밟는다고 앙탈하지 않습니다. 꽃들은 땅으로 지면서도 붉은 이파리를 버리지 않고 더 붉어집니다. 하루의 해가 저물고 저녁이 놀을 데리고 산을 내려와 지붕을 덮을 때 나무들은 제 그림자를 추슬러 어둠 속으로 묻힙니다. 그땐 누구라도 가슴속으로 불러보고 싶은 이름이 떠오릅니다. 가슴속에 불러볼 이름이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좌 아니겠습니까.

   물드는 저녁놀 아래서 하루를 돌아보는 마음, 그것보다 애틋하고 진실한 삶이 또 있겠습니까? 생은 그다지 긴 것도 그다지 짧은 것도 아닙니다. 생은 길다거나 짧다거나 하는 것은 오로지 그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입니다. 누구의 생이건 생은 숨 쉬고 걸어가고 피안에 닿고 싶어 하고 그리고 가끔은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보면서 추회에 젖기도 합니다. 그것이 생을 일으키고 생을 완성하는 자양분이 됩니다. 생에는 속성 재배란 없습니다. 하루 만에 다 이루어지는 생은 없습니다. 우리의 생은 그토록 하루하루, 초록에서 푸름으로, 푸름에서 붉음으로 제 몸을 옮겨가는 과일과 같습니다.

   생은 그리움을 먹고 키가 큽니다. 그러나 그리움도 너무 무거우면 조금은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내려놓는다는 건 버림이 아니라 내일을 위한 저장이고 키움입니다. 익는 과일처럼 조금씩 조금씩 완성되기에 자신에게 온 생은 자신의 귀빈입니다.

- 시집 <우리 집으로 건너온 장미꽃처럼 시가 이렇게 왔습니다>  80-81쪽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