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시) 미안하다 1 – 이희중 시인(1960-)

밝은하늘孤舟獨釣 2024. 4. 23. 08:59

아래의 시는 시집을 읽다가 좋아서 기록해 둔다. 나중에라도 다시 보고 싶을 때가 올 수 있을 것이다.

 

미안하다 1 – 이희중 시인(1960-)

 

꽃들아, 미안하다
붉고 노란빛이 사람 눈을 위한 거라고
내 마음대로 고마워한 일
나뭇잎 풀잎들아 미안하다
너희 푸른빛이 사람을 위안하려는 거라고
내 마음대로 놀라워한 일
꿀벌들아, 미안하다
애써 모은 꿀이 사람의 몸을 위한 거라고
내 마음대로 기특해한 일
, 바퀴, 쐐기, 모기, 빈대들아 미안하다
단지 사람을 괴롭히려고 사는 못된 것들이라고
건방지게 미워한 일

사람들아, 미안하다
먹이를 두고 잠시 서로 눈을 부라리고는
너희를 적이라고 생각한 일

내게 한순간 꾸며 보인 고운 몸짓과 귀한 말에 묶여

너희를 함부로 사랑하고 존경한 일

다 미안하다

혼자 잘난 척, 사람이 아닌 척하며

거추장스러워 구박해온 내 마음에게도

 

작은 것이나 큰 것이다

남을 위해, 사람과 세상을 위해 살기보다

제 몸과 마음을 위해,

또 제 새끼를 위해 사는 이치를 이제야 알아서

정말 미안하다

 

- 문학동네에서 2018년 펴낸 문학동네시인선 098, 이희중 시집 <나는 나를 간질일 수 없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