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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 모항으로 가는 길 – 안도현 시인
    현대시/한국시 2024. 6. 29. 11:55

       아래의 시는 어제 오후 라디오 모 프로그램에서 잠깐 인용된 시이다. 프로그램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모항으로 가는 길 안도현 시인

    ,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 따위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
    비로소 여행이란,
    인생의 쓴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댕이쳐 보는 거야
    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 분쯤 달리면
    객지밥 먹다가 석삼 년만에 제 집에 드는 한량처럼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 거야
    먼데서 오신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하자고,
    조용하고 깨끗한 방도 있다고,
    바다는 너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대수롭지 않은 듯 한 마디 던지면 돼
    모항에 가는 길이라고 말이야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거든

    모항 가는 길은 우리들 생이 그래왔듯이
    구불구불하지, 이 길은 말하자면
    좌편향과 우편향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한데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드는 싸움에 나섰다가 지친 너는,
    너는 비록 지쳤으나
    승리하지 못했으나 그러나, 지지는 않았지
    저 잘난 세상쯤이야 수평선 위에 하늘 한 폭으로 걸어두고
    가는 길에 변산 해수욕장이나 채석강 쪽에서 잠시
    바람 속에 마음을 말려도 좋을 거야
    그러나 지체하지는 말아야 해
    모항에 도착하기 전에 풍경에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촌스러우니까
    조금만 더 가면 훌륭한 게 나올 거라는
    믿기 싫지만, 그래도 던져버릴 수 없는 희망이
    여기까지 우리를 데리고 온 것처럼
    모항도 그렇게 가는 거야

    모항에 도착하면
    바다를 껴안고 하룻밤 잘 수 있을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너는 물어오겠지
    아니, 몸에다 마음을 비벼 넣어 섞는 그런 것을
    꼭 누가 시시콜콜 가르쳐 줘야 아나?
    걱정하지마, 모항이 보이는 길 위에 서기만 하면
    이미 모항이 네 몸 속에 들어와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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