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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두려움 없이 - 이정옥현대시/한국시 2025. 4. 18. 19:41
두려움 없이 - 이정옥
죽음이 창 밖에서 머뭇거릴 때
두려움 없이 문을 열게 하소서
지난 날들은 축복이었습니다
봄날은 얼마나 다사로웠습니까
꽃들이 다투어 핀 뜰에서
당신을 잊고 산 그 행복했던 날들
죽음이 깊은 밤 문을 두드럴 때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게 하소서
지난 날들은 은총이었습니다
빈 잔은 어느 사이 가득 채워지고
떠날 벗들이 돌아온 뜰에서
비로소 당신의 섭리를 깨우치던
감동과 기쁨의 숱한 만남들
죽음이 떠나기를 재촉할 때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게 하소서
젊은 날 사랑의 아픔들은
당신이 마련한 시련이었고
노년에 주신 외로운 밤들은
보속을 위한 기도의 시간임을
이 모든 날들을 허락하신
당신께 기꺼이 나아가리이다
우리가 숨을 거둘 때
우리의 영혼을 순결하게 하여
당신 곁으로 불러주시리라 믿습니다
벗들의 슬픔이 멎기도 전에
우리의 영혼을 품에 안고
당신 뜰로 데려가시리라 믿습니다
거듭 태어나기 위해
꽃들은 말없이 바람에 흩날리고
열매는 땅 위로 떨어지나이다
어느 날 불현듯 창문을 흔들며
죽음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 때
미소지으며 따라가게 하소서
성 황석두루가서원에서 1993년 간행한 천주교 문학 시선 1, 이정옥 시집 <채워지지 않은 잔이 더 아름답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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