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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 정호승 (1950- )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중에서 수녀들이 날마다 강간을 당한다 술취한 아버지를 아들이 칼로 찌르고 방에 불을 지르고 어머니가 발가벗고 아들에게 체위를 가르친다 아침마다 지하철은 개미들을 가득 싣고 한강으로 빠지고 개들이 고무신을 신고 낙엽을 밟으며 청와대 앞..
기다림 / 모윤숙 (1910-1990) 천 년을 한 줄 구슬에 꿰어 오시는 길을 한 줄 구슬에 이어 드리겠습니다. 하루가 천 년에 닿도록 길고 긴 사무침에 목이 메오면 오시는 길엔 장미가 피어지지 않으오리다. 오시는 길엔 달빛도 그늘지지 않으오리. 먼 먼 나라의 사람처럼 당신은 이 마음의 방언(方言)을 왜 그..
긍정적인 밥 / 함민복 (1962-) 시 한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에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
그 꽃의 기도 / 강은교 (1945-) 오늘 아침 마악 피어났어요 내가 일어선 땅은 아주 조그만 땅 당신이 버리시고 버리신 땅 나에게 지평선을 주세요 나에게 산들바람을 주세요 나에게 눈 감은 별을 주세요 그믐 속 같은 지평선을 그믐 속 같은 산들바람을 그믐 속 같은 별을 내가 피어 있을 만큼만 내가 일..
그림자도 반쪽이다 / 유안진 (1941- ) 편두통이 생기더니 한 눈만 쌍꺼풀지고 시력도 달라져 짝눈이 되었다 이명도 가려움도 한 귀에만 생기고 음식도 한쪽 어금니로만 씹어서 입꼬리도 쳐졌다 오른쪽 팔다리가 더 길어서 왼쪽 신이 더 빨리 닳는다 모로 누워야 잠이 잘 오고 그쪽 어께와 팔이 자주 저리..
그림자 / 정호승 (1950- )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에서 어떤 사람은 자기의 그림자가 한 마리 새의 그림자가 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그림자가 한 그루 나무의 그림자가 될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그림자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손의 그림자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
행복한 사람 / 윤재림 행복한 사람은 세월과 사이 좋은 사람. 가는 시간은 아쉽게 떠나보내고 오는 시간은 가슴 설레며 기다리는 사람. 행복한 사람은 사는 곳과 사이가 좋은 사람. 자신의 고향은 아니지만 아들딸의 고향이란 생각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 행복한 사람은 사람들과 사이 좋은 사람. ..
그런 사람이 있었네 / 주용일 (1964-) <꽃과 함께 식사> 중에서 목숨을 묻고 싶은 사람이 있었네 오월 윤기나는 동백 이파리 같은 여자, 지상 처음 듣는 목소리로 나를 당신이라 불러준, 칠흑 같은 번뇌로 내 생 반짝이게 하던, 그 여자에게 내 파릇한 생 묻고 싶은 적 있었네 내게 보약이자 독이었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