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깊은 밤에 하현달 / 목필균 사흘을 울고 나더니 소리 없이 하현달이 떴다. 울어도 가버릴 사람 다 가버린 깊은 밤, 슬그머니 눈물 닦고 창가에 걸터앉아 내 안을 들여다본다. 희미한 불빛으로 새어 나왔을 쓰다만 일기장 속을 비스듬히 기대서서 훔쳐보는 야윈 얼굴. 비 내린 사흘 동안 홀로 제 몸 말렸..
깊은 눈 / 이재무 (1958- ) 마을 회관 한 구석 고물상 기다리며 한 마리 늙고 자찬 짐승처럼 쭈그려 앉은, 흙에서 멀어진 적막과 폐허를 본다 젊어 한때 쟁기가 되어 수만 평의 논 갈아엎을 때마다 무논 젖은 흙들은 찰랑찰랑 얼마나 진저리치며 환희에 들떠 바르르 떨어댔던가 흙에 생 담궈야 더욱 빛나..
어머니 / 남진원 사랑스런 것은 모두 모아 책가방에 싸 주시고 기쁨은 모두 모아 도시락에 넣어주신다 그래도 어머니는 허전하신가봐 뒷모습 지켜보시는 그 마음 나도 잘 알지
어머니 / 김초혜 (1943-) 한 몸 이었다 서로 갈려 다른 몸 되었는데 주고 아프게 받고 모자라게 나뉘일 줄 어이 알았으리 쓴 것만 알아 쓴 줄 모르는 어머니 단 것만 익혀 단 줄 모르는 자식 처음대로 한몸으로 돌아가 서로 바꾸어 태어나면 어떠하리 2 우리를 살찌우던 당신의 가난한 피와 살은 삭고 부서..
쥐(鼠) / 한용운 (1879-1944) 나는 아무리 좋은 뜻으로 너를 말하여도 너는 적고 방정맞고 얄미운 쥐라고 밖에 할 수가 없다. 너는 사람의 결혼의상과 연회복을 낱낱이 쪼서놓았다. 너는 쌀궤와 팟멱사리를 다 쪼고 물어내었다. 그 외에 모든 기구를 다 쪼서 놓았다. 나는 쥐덫을 만들고 고양이를 길러서 너..
오매 단풍 들겄네 / 김영랑 (1903-1950) 오매 단풍들것네 장광에 골 불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들것네 추석이 내일 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들것네
발자국 / 김명수 (1945-) 바닷가 고요한 백사장 위에 발자국 흔적 하나 남아 있었네 파도가 밀려와 그걸 지우네 발자국 흔적 어디로 갔나? 바다가 아늑히 품어 주었네.
바다의 눈 / 김명수 (1945-) 바다는 육지의 먼 산을 보지 않네 바다는 산 위의 흰 구름을 보지 않네 바다는 바다는, 바닷가 마을 10여 호 남짓한 포구 마을에 어린아이 등에 업은 젊은 아낙이 가을 햇살 아래 그물 기우고 그 마을 언덕바지 새 무덤 하나 들국화 피어 있는 그 무덤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