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
(詩) 놓았거나 놓쳤거나 - 천양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8. 22. 22:42
놓았거나 놓쳤거나 – 천양희 시인 내가 속해 있는 대낮의 시간 한밤의 시간보다 어두울 때가 있다 어떤 날은 어안이 벙벙한 어처구니가 되고 어떤 날은 너무 많은 나를 삼켜 배부를 때도 있다 나는 때때로 편재해 있고 나는 때때로 부재해 있다 세상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고 믿는 것만큼 확실한 오류는 없다고 생각한 지 오래다 불꽃도 타오를 때 불의 꽃이라서 지나가는 빗소리에 깨는 일이 잦다 고독이란 비를 바라보며 씹는 생각인가 결혼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혼에 성공한 것이라던 어느 여성 작가의 당당한 말이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고 내게 중얼거린다 삶은 고질병이 아니라 고칠 병이란 생각이 든다 절대로 잘못한 적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뿐이다 언제부터였나 시간의 넝쿨이 나이의 담을 넘고 있다 누군..
-
(詩) 모를 일 - 천양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8. 20. 18:26
모를 일 -천양희 시인 탁상시계는 무슨 일로 탁상공론하듯 재잘거리는지 모를 일이다 허수아비는 무슨 수로 허수의 아비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허허벌판은 무엇으로 허심탄회하게 넓이를 보여주는지 모를 일이다 무심한 하늘은 무엇 때문에 무심코 땅을 내려다보는지 모를 일이다 인생은 무슨 이유로 환상은 짧고 환멸은 긴지 모를 일이다 무슨 일이든 무슨 수로든 무엇으로든 무엇 때문이든 무슨 이유든 그 무엇도 모를 일 세상이 광목이라면 있는 대로 부욱 찢어버리고 싶은지 정말로 모를 일이다 시집 에서
-
(詩) 그때가 절정이다 - 천양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8. 20. 18:21
그때가 절정이다 – 천양희 시인 하늘에 솔개가 날고 있을 때 지저귀던 새들이 숲으로 날아가 숨는다는 걸 알았을 때 경찰을 피해 잽싸게 골목으로 숨던 그때를 생각했다 맞바람에 나뭇잎이 뒤집히고 산까치가 울면 영락없이 비 온다는 걸 알았을 때 우산도 없이 바람 속에 얼굴을 묻던 그때를 생각했다 매미는 울음소리로 저를 알리고 지렁이도 심장이 있어 밟으면 꿈틀한다는 걸 알았을 때 슬픔에 비길 만한 진실이 없다고 믿었던 그때를 생각했다 기린초는 척박한 곳에서만 살고 무명초는 씨앗으로 이름값 한다는 걸 알았을 때 가난을 생각하며 ‘살다’에다 밑줄 긋던 그때를 생각했다 제 그림자 밟지 않으려고 햇빛 마주 보며 걸어갔던 시인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고독에 바치는 것이 시라는 걸 알았을 때 시가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