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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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샛강 – 노향림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9. 20. 21:54
샛강 – 노향림 시인 봄이 풀어진 눈매로 강 둔치에 포복해오고 헝클린 머리 강이 파랗다. 실버들이 기지개를 켠다 제 몸 속의 물소리 바아내느라 파랗다. 봄이 제 갈 길 멀다고 절두산 성지 아래 희끗희끗한 잔해로 남았다 안색이 창백한 갈대의 머리채를 잡고 막무가내로 흔든다 무슨 일일까. 누군가 시름시름 앓다가 내버린 마음속의 그루터기들이 집착처럼 남았다. 몸의 가는 신경올을 건드렸을까. 물은 사방 낮게 흐른다. 할로겐 불빛 희미한 비공개 지하 성인묘지 앞 계단에서 대낮부터 한 노파가 무릎 꿇어 일어날 줄 모른다 몇끼의 금식으로 십자성호를 그을까. 우수(雨水) 지나 움츠렸던 청청하늘이 성급히 창문 여닫는 소리. 당산 지나 옛 나루터 자리 간 곳 없고 양화대교만 차들이 어지러이 달려서 소란스럽다. 뒤돌아보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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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나는 기쁘다 – 천양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9. 16. 23:32
나는 기쁘다 – 천양희 시인 바람결에 잎새들이 물결 일으킬 때 바닥이 안 보이는 곳에서 신비의 깊이를 느꼈을 때 혼자 식물처럼 잃어버린 것과 함께 있을 때 사는 것에 길들여지지 않을 때 욕심을 적게 해서 마음을 기를 때 슬픔을 침묵으로 표현할 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으므로 자유로울 때 어려운 문제의 답이 눈에 들어올 때 무언가 잊음으로써 단념이 완성될 때 벽보다 문이 좋아질 때 평범한 일상 속에 진실이 있을 때 하늘이 멀리 있다고 잊지 않을 때 책을 펼쳐서 얼굴을 덮고 누울 때 나는 기쁘고 막차 기다리듯 시 한 편 기다릴 때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이 시 쓰는 일일 때 나는 기쁘다 천양희 시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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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나리소 -도종환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9. 4. 16:41
나리소 – 도종환 시인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 가장 고요해지는 사랑이 깊은 사랑이다 나릿재 밑에 나리소 못이 가장 깊고 고요하듯 요란하고 진부한 수식이 많은 사랑은 얕은 여울을 건너고 있는 사랑이다 사랑도 흐르다 깊은 곳을 만나야 한다 여울을 건너올 때 강물을 현란하게 장식하던 햇살도 나리소 앞에서는 그 반짝거림을 거두고 조용해지듯 한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 마음이 가장 깊고 착해지지 않으면 진짜 사랑이 아니다 물빛처럼 맑고 투명하고 선해지지 않으면 도종환 시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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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눈 덮인 새벽 - 도종환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9. 4. 12:43
눈 덮인 새벽 - 도종환 시인 세상을 온통 하얗게 덮어놓고 새벽은 산허리로 물러나 앉은 채 사람들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헐벗은 나뭇가지도 텅 빈 들판도 감히 손대기 어려운 고운 풍경으로 바꾸어놓고 고요히 호흡을 가다듬는 초겨울 새벽에는 나도 조건 없이 남을 덮어주고 싶습니다 용서하고 싶습니다 내 마음 눈 덮인 들판처럼 넓고 깨끗해져 그러는 건 아니고 지난날 용서받고 싶은 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틀거리며 걸어온 발자국을 함박눈이 밤새 덮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끄럽게 돌아선 골목길 있어야 할 어려운 자리를 지키지 않고 내내 마음 무겁던 나날들과 지키지 못한 언약들도 눈처럼 다 덮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도종환 시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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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공자(孔子)의 생활난(生活難) - 김수영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9. 2. 23:00
공자(孔子)의 생활난(生活難) - 김수영 시인 꽃이 열매의 상부(上部)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작란(作亂)을 한다. 나는 발산(發散)한 형상(形象)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作戰)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 이태리어(語)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叛亂性)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事物)과 사물의 생리(生理)와 사물의 수량(數量)과 한도(限度)와 사물의 우매(愚昧)와 사물의 명석성(明晳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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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홍범도 장군의 절규 - 이동순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9. 1. 23:28
뉴스를 보다가 이 시를 접하고 이곳에 옯겨보았다. 진짜 이런 bullshit같은 일은 없어야 하는데...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는 묵인해놓고, 말로는 부인도 찬성도 안 했다고, 말장난하는 영혼이 없는 싼티나는 인간들, 홍 장군의 가벼운 흠을 잡아 욕보이는 인간들, 그리고 제 역할 확실히 한 군인을, 최고 존엄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어거지로 죄명을 목에 달아 입막음 하고 처벌하려는 머저리 저능아 인간들을, 귀신들아, 제발 이런 인간들 좀 잡아가다오. 홍범도 장군의 절규 - 이동순 시인 그토록 오매불망 나 돌아가리라 했건만 막상 와본 한국은 내가 그리던 조국이 아니었네 그래도 마음 붙이고 내 고향 땅이라 여겼건만 날마다 나를 비웃고 욕하는 곳 이곳은 아닐세 전혀 아닐세 왜 나를 친일매국노 밑에 묻었는가 그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