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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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아무도 없는 별 - 도종환 시인(1954-)현대시/한국시 2023. 9. 1. 10:17
벌써 선선해진 9월의 첫날이다. 완연한 가을의 쓸쓸한 분위기를 얼마전부터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별 – 도종환 시인(1954-) 아무도 없는 별에선 그대도 나도 살 수 없다 달맞이꽃이 피지 않는 별에선 해바라기도 함께 피어나지 않고 폭풍우와 해일이 없는 곳에선 등 푸른 물고기도 그대의 애인도 살 수 없다 때로는 화산이 터져 불줄기가 온 땅을 휩쓸고 지나고 그대를 미워하는 마음 산을 덮어도 미움과 사랑과 용서의 긴 밤이 없는 곳에선 반딧불이 한 마리도 살 수 없다 때로는 빗줄기가 마을을 다 덮고도 남았는데 어느 날은 물 한 방울 만날 수 없어 목마름으로 쓰러져도 그 물로 인해 우리가 사는 것이다 강물이 흐르지 않는 별에선 그대도 나도 살 수 없다 낙엽이 지고 산불에 산맥의 허리가 다 타들어가도 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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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강변 마을 - 노향림 시인 (1942-)현대시/한국시 2023. 8. 28. 19:51
강변 마을 - 노향림 시인 찻집 '째즈'에 올라간다. 카펫 붉게 깔린 삼층 계단 옆에서 제 몸집보다 큰 트럼펫을 들고 흑인 가수 루이 암스트롱의 커단 눈망울이 잠시 나를 노려본다. 브랜드 커피엔 하얀 각설탕을! 카푸치노? 아니, 아니 나는 블랙만 마실 거야 블랙혹이라는 말보다는 더 검은 커피를? 그럼 긓지, 검은 커피 한잔이 내 앞에 당도한다. 나는 강변 마을에 와서도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창가가 참 좋다. 오늘따라 바람이 센지 짱짱한 구름떼만 하늘에서 펄럭인다. 브래지어가 흘러내리고 흰 속 치마가 절반쯤 뜯기고 찢겨나간 구름을 보는 것이 참 좋다. 아직 봄은 일러서 오지 않고 꽃샘바람에 눈꺼풀 닫은 채 종일 공중을 향해 팔을 벌리고 벌서듯 서 있는 나무들 매캐한 매연 속에 푸른 잎을 틔울까 말까 생각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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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다소 의심쩍은 결론 - 천양희 시인(1942-)현대시/한국시 2023. 8. 28. 19:42
다소 의심쩍은 결론 – 천양희 시인 으악새는 새가 아니라 풀이고요 용서대는 누각이 아니라 물고기라네요 날 궂은 날 때까치는 울지 않고요 잠자리는 죽어서도 날개를 접지 않는다네요 길이 없는 숲속에 근심이 없고요 파도 소리 있는 곳에 황홀이 있다네요 물은 절대 같은 물결 그리지 않고요 돌에도 여러 무늬가 있다네요 시작해야 시작되고요 미쳐야 미친다네요 사람에게 우연인 것이 신에게는 의도적 섭리라네요 이로운 자리보다 의로운 자리가 꽃자리라네요 그러니까 모든 완성은 속박이라네요 천양희 시집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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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하늘이 제 빛으로 - 박일규 시인(1933-)현대시/한국시 2023. 8. 26. 22:34
하늘이 제 빛으로 - 박일규 시인 하늘이 제 빛으로 보이는 날은 새삼 기도문을 외우지 말자 고운 하늘빛 내려 앉도록 맑게 마음의 뜨락을 쓸자 배도 돛도 안 보이는 머언 하늘가 하늘과 바다가 하나로 뵈는 날은 묵상과 염도도 고이 멈추자 나도 내 마음도 아득히 멀고 하늘만 맑게 보이는 날은 아무 기도문도 외우지 말자 사랑이, 거룩함이 누리에 자욱하면 어떤 기도문도 외우지 말고 처음인듯 우러러 하늘을 보자 *시인 소개* 박일규 시인은 1933년 전라북도 정읍 학동에서 태어나 전주농업학교, 전북대 상대를 거쳐 사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6·25 사변 때 사업에 투신하여 한국중앙기계 대표, 내쇼날 합성대표, 한국후지기계주식회사 회장 등을 지냈다. 한편 청년기부터 다듬어온 시력詩力으로 중년에 미당 서정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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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놓았거나 놓쳤거나 - 천양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8. 22. 22:42
놓았거나 놓쳤거나 – 천양희 시인 내가 속해 있는 대낮의 시간 한밤의 시간보다 어두울 때가 있다 어떤 날은 어안이 벙벙한 어처구니가 되고 어떤 날은 너무 많은 나를 삼켜 배부를 때도 있다 나는 때때로 편재해 있고 나는 때때로 부재해 있다 세상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고 믿는 것만큼 확실한 오류는 없다고 생각한 지 오래다 불꽃도 타오를 때 불의 꽃이라서 지나가는 빗소리에 깨는 일이 잦다 고독이란 비를 바라보며 씹는 생각인가 결혼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혼에 성공한 것이라던 어느 여성 작가의 당당한 말이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고 내게 중얼거린다 삶은 고질병이 아니라 고칠 병이란 생각이 든다 절대로 잘못한 적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뿐이다 언제부터였나 시간의 넝쿨이 나이의 담을 넘고 있다 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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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모를 일 - 천양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8. 20. 18:26
모를 일 -천양희 시인 탁상시계는 무슨 일로 탁상공론하듯 재잘거리는지 모를 일이다 허수아비는 무슨 수로 허수의 아비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허허벌판은 무엇으로 허심탄회하게 넓이를 보여주는지 모를 일이다 무심한 하늘은 무엇 때문에 무심코 땅을 내려다보는지 모를 일이다 인생은 무슨 이유로 환상은 짧고 환멸은 긴지 모를 일이다 무슨 일이든 무슨 수로든 무엇으로든 무엇 때문이든 무슨 이유든 그 무엇도 모를 일 세상이 광목이라면 있는 대로 부욱 찢어버리고 싶은지 정말로 모를 일이다 시집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