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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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1952~) 시인현대시/한국시 2022. 9. 20. 23:38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1952~) 시인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곱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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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수레바퀴 언덕 / 최창균 시인현대시/한국시 2022. 9. 18. 19:56
수레바퀴 언덕 / 최창균 시인 수레국화 언덕 끌고 언덕 오르는 데 일년 봄맞이꽃 언덕 끌고 언덕 내려가는 데 일년 일년은 언덕이라는 수레바퀴가 한바퀴 도는데 꼬박 걸리는 시간 언덕이 한바퀴 또 한바퀴 여름풀 겨울나무 언덕 끌고 나타난다 언덕의 수레바퀴 돌아가는 속도대로 꽃 피고 꽃 지고 나비 날고 벌떼 잉잉거린다 모든 생의 언덕은 분침초침처럼 조금 느리게 아주 빠르게 돌기도 한다 간혹 제 언덕의 바퀴에 깔린 검은 나무는 죽은 시간의 잠으로 또 한바퀴 그렇게 나도 언덕을 끌고 여기까지 왔다 내가 끌고 온 언덕이 데굴데굴 내가 탕진해버린 언덕이 데굴데굴 구르고 굴러도 언덕인 내 평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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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사라진 계절 - 천양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2. 9. 18. 19:54
사라진 계절 - 천양희 시인 사자별자리 자취를 감추자 봄이 갔다 꽃이 피었다고 웃을 수만은 없는 그런 날이었다 쾅 문을 닫는 순간 내 안의 무엇인가 쾅, 하고 닫혔다 고통이란 자기를 둘러싼 이해의 껍질이 깨지는 것이었다 전갈자리별 자취를 감추자 여름이 갔다 초록 나무에도 그늘이 짙은 그런 날이었다 종이 위에 생각을 올려놓는 순간 말할 수 없어 나는 침묵을 썼다 외로움은 내 존재가 피할 수 없이 품은 그늘이었다 노랑발도요새가 자취를 감추자 가을이 갔다 고독이 지쳐 뼈아프게 단풍드는 그런 날이었다 잃다와 잊다가 같은 말이란 걸 아는 순간 내 속에 피가 졌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것이 내가 살아남은 유일한 이유였다 흰꼬리딱새가 자취를 감추자 겨울이 갔다 몸이 있어서 추운 그런 날이었다 안다고 끝나는 게 세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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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꽃바구니 – 나희덕 시인현대시/한국시 2022. 9. 18. 19:52
꽃바구니 – 나희덕 시인 자, 받으세요, 꽃바구니를. 이월의 프리지아와 삼월의 수선화와 사월의 라일락과 오월의 장미와 유월의 백합과 칠월의 칼라와 팔월의 해바라기가 한 오아시스에 모여 있는 꽃바구니를. 이 꽃들의 화음을. 너무도 작은 오아시스에 너무도 많은 꽃들이 허리를 꽂은 한 바구니의 신음을. 대지를 잃어버린 꽃들은 이제 같은 시간을 살지요. 서로 뿌리가 다른 같은 시간을. 향기롭게, 때로는 악취를 풍기며 바구니에서 떨어져내리는 꽃들이 있네요. 물에 젖은 오아시스를 거절하고 고요히 시들어가는 꽃들, 그들은 망각의 달콤함을 알고 있지요. 하지만 꽃바구니에는 생기로운 꽃들이 더 많아요. 하루가 한 생애인 듯 이 꽃들 속에 숨어 나도 잠시 피어나고 싶군요. 수줍게 꽃잎을 열듯 다시 웃어보고도 싶군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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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잘 익은 사과 – 김혜순 시인현대시/한국시 2022. 9. 14. 08:14
잘 익은 사과 – 김혜순 시인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구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